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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페르세폴리스 _ 뱅상 파로노, 마르잔 사트라피

by 오직~ 2008. 5. 24.

 

영화가 아니라면

이처럼 쉽고 단순하고 따뜻하게 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형편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오히려 에니메이션이라서 더욱 진실하게 "이란"의 암울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감독 : 뱅상 파로노, 마르잔 사트라피 2007作

20080523씨네큐브

 

 

얼굴은 하얗고 머리는 까맣다. 눈은 길게 찢어진 타원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고, 입은 한줄짜리 곡선이다. 기술의 진화를 과시하며 갈수록 치밀하게 실재를 모사하는 3D애니메이션의 호황 속에서 이 얼마나 뒤떨어진 모양새인지. 하지만 연습장을 북 찢어놓은 듯한 흑백의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는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 범상한 교훈을 설파하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는 정반대로 단순하고 간소한 그릇에 복잡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란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마르잔 사트라피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동명의 그래픽 노블에 담았고, 책이 성공을 거두자 언더그라운드 만화작가인 뱅상 파르노와 함께 생애 첫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6여년의 시간을 담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소녀 마르잔이 혁명과 전쟁의 난기류를 헤치고 국경을 넘나들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좇는다. 부유하고 진보적인 부모 밑에서 자유롭게 자란 마르잔은 이소룡과 마이클 잭슨을 숭배하고 감자튀김을 사랑하는 소녀다. 하지만 독재 왕정을 몰아내고자 했던 혁명의 이상이 이슬람 근본주의로 교체되고, 이라크 침공으로 나라가 전화에 휩싸이면서 마르잔은 부모의 품을 떠나 오스트리아를 향한다. 서구의 물질적 풍요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잠시,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절감한 마르잔은 마약과 노숙생활로 방황을 이어가다 다시 고국으로 향한다.

이국의 관객에겐 생소하고 난해할 이란의 현대사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좀더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순간들로 전달된다. 예컨대 팔레비 국왕의 실각과 뒤따른 정치적 격변은 ‘국왕은 신의 선택’이라고 가르치던 마르잔의 학교가 이내 교과서 첫장의 국왕 사진을 뜯어내도록 지시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슬람 근본주의는 인체소묘 수업에서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델을 스케치해야 하는 웃지 못할 고충으로 그려진다. 역사의 질곡들을 차례차례 밟아가는 소녀의 성장기는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온몸으로 증명하지만, 그것이 결코 교조적이거나 계몽적이지는 않다. 마르잔은 힘없이 꺾이는 순수의 상징도 고결한 운동가도 아니다. 불합리한 권위에 야무지게 대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영웅 대접해주는 패들에 혹해 방탕한 생활에 빠져드는 그녀는 용감하고 자유로운 만큼이나 성급하고 어리석다. 이상과 구호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한 인간의 모순된 발자취가 맞물려 <페르세폴리스>는 드라마적인 흥분과 짙은 정서적 감응을 동시에 이끌어낸다.

마르잔 사트라피와 뱅상 파르노가 사트라피의 아파트 겸 스튜디오에서 8만장의 드로잉을 그려 완성했다는 애니메이션은 2차원의 평면을 무한 확장하는 독창적이며 우아한 마법을 보여준다. 팔레비 정권과 서방세계의 밀월은 풍자적인 인형극으로, 반정부 시위와 전쟁 등 유혈의 순간들은 침통한 그림자극으로 표현됐다. 마르잔의 옷차림을 단속해 잡아가려는 혁명 수호대의 여성들이 거대한 뱀처럼 늘어나 소녀를 휘감고, 사랑에 빠진 연인을 태운 자동차가 오스트리아의 밤거리를 꿈결처럼 날아다니는 등 사트라피의 검은 펜은 자유로움과 재치, 상상력으로 반짝거린다. <페르세폴레스>가 “영광스러운 이슬람 혁명에 대한 비사실적인 묘사”라고 낙인 찍은 이란 정부는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프랑스 대사관에 서한을 보내는 등 압력을 행사했으나, 결국 <페르세폴리스>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고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 최하나

 

1. 서구화의 기치를 내건 독재정권, 팔레비 왕조(1926∼79)

이란의 역사는 20세기 들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1926년 팔라비 1세로 등극한 레자 샤는 페르시아로 이어져오던 국호를 이란으로 바꾼 뒤 조국의 근대화를 외치며 서구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근대적인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차도르의 착용을 자유화하는 등 전방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한편으로는 의회를 무력화하고 언론을 검열하는 등 악명 높은 독재자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자 샤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한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는 노골적인 친서방 노선을 취했다. 당시 그에 맞서 석유의 국유화를 추진했던 총리 모하메드 모사데크가 미국과 영국 정보부의 사주로 암살되자, 자연히 이란의 이권은 서구 석유회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서방세계와의 밀월로 권력을 지탱하던 팔레비 2세는 비밀경찰을 조직해 반대 세력을 말살하는 독재 통치를 이어갔고, 이란 국민 사이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높아져갔다.

 

2. 이란 왕조의 종말, 이슬람 혁명(1979)

팔레비 왕조에 등을 돌렸던 종교 세력은 1962년 팔레비 2세가 이슬람 재단의 토지를 몰수하는 ‘백색 혁명’을 추진하자 1963년 6월 호메이니의 주도로 반백색혁명을 일으킨다.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고 호메이니는 이라크로 망명했지만, 팔레비 정권에 반발하던 이란 국민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민간인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수천명을 학살한 정권의 강경대응은 반정부운동에 불을 붙였고, 계속되는 파업과 시위로 수세에 몰린 팔레비 2세는 결국 이집트로 도망길에 오른다. 1979년 3월에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98%가 공화국 수립을 지지했고,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호메이니가 4월1일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란의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3.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이슬람의 뿌리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던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공적으로 의회에 진출한 성직자들은 공화국 헌법을 통해 종교계에 초의회적인 권력을 일임했다.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니 사드르는 혁명기구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했지만, 성직자 중심의 공화당 세력과 번번이 맞부딪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과거 정권 인사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고문, 재산 몰수, 처형이 빈번하게 자행됐고, 사디르 대통령은 결국 국회의 탄핵으로 쫓겨나 파리로 망명한다. 이후 차도르의 착용을 감시하는 혁명 수호대가 활동하는 등 사회 전반에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강요되면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열망은 공고한 이슬람 근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4. 75년간의 협정을 깬 ‘수로 싸움’, 이란-이라크 전쟁(1980∼88)

1980년 9월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고 있던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75년 양국간에 체결된 국경협정인 ‘알제협정’을 이란이 파기한 데 있었다. 1975년 팔레비 왕과 후세인간에 체결된 알제협정은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는 샤트 알 아랍 수로를 이라크가 갖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알제협정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하자 양국간에 분쟁이 노골화됐고, 이라크는 수로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침공을 감행했다. 후세인은 이란이 혁명으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고 정치적·경제적 혼란에 처해 있는 만큼 단기전을 예상했지만, 그의 판단은 빗나갔다. 지리한 장기전에 들어서면서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100만명의 희생자만을 남긴 채 유엔의 중재에 따라 휴전에 들어갔다.

5. 21세기 이란, 다시 보수화의 길

2005년 6월 ‘제2의 이슬람 혁명’을 주창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란은 다시 공고한 보수화의 길에 들어섰다. 테헤란 시장으로 역임할 당시 패스트푸드 식당을 철거하고, 직원들에게 의무적으로 수염을 기르게 하는 등 철저한 이슬람 근본주의로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아마디네자드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정신의 회복”을 통치 철학으로 내세웠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무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이 약속했던 핵개발 보류를 깨고 우라늄 전환시설을 가동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편 올해 3월 치러진 총선에서 이란의 보수파가 의석의 과반을 차지했고, 이중 대다수가 이슬람의 가치수호를 강조하는 근본주의 세력인만큼 이란사회의 보수화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 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