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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고 반대로 행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만 다치는걸...

by 오직~ 2006. 9. 4.
폴란드 여자 소설가 올가 토카르축의 부모님은 골수 공산당원이었다고 한다. 올해 마흔세 살인 올가는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유물론의 세계 속에서 자랐다. 그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우연히 올가는 불교에 대해 설명하는 한 페이지 분량의 글을 읽었고, 그 순간부터 불교도가 됐다.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멋져서 탄성을 내질렀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은 불교도라고 선언하는 열다섯 살 유물론 소녀.
 

그런 올가였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동양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부석사에 갔을 때도 올가는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올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부럽다. 내가 열반에 이르려면 동양인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당신들보다는 한 번 더 생을 거쳐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런 올가가 찬탄하고 칭송하고 감격해 마지않았던 영화가 바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었다. 올가는 그 영화가 왜 놀라운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최근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라고 말했을 때, 나는 당연히 올가를 떠올렸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김기덕의 영화가 쓰레기가 될 수 없는 건 올가의 인생 때문이었다. 나는 올가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가 유럽인이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구분마저도 그가 느낀 감동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다. 자진해서 불교도가 된 올가는 폴란드 사회 내에서 김기덕 감독만큼 오해받으며 살아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다는 사실에 따뜻한 감동을 받았을 테니까.

 

나는 김기덕의 영화가 예술적이라서, 혹은 불편한 미감이 있어서 마땅히 존재해야만 한다는 논리에는 반대한다. 그렇게 따지자면 한 명쯤의 김기덕은 적당하고 두세 명의 김기덕은 너무 많다는 뜻인가? 그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영화였다면 한 명의 김기덕도 너무 많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세상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구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감독이라면 수만 명이라고 해도 너무나 적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올가처럼 깊은 감동을 느낄 만한 인생의 계기는 없었지만, 나 역시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좋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예술적으로 뛰어나다거나 불편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김기덕 감독은 우리를 볼모로 삼고 자신의 영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말을 거는가. 김기덕 감독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보복으로 영화를 더는 찍지 않는다고 치자. 그래봐야 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달라질 일이 하나도 없다. 달라지는 건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당연히 이건 비겁한 태도다. 차라리 그동안 그의 영화를 혐오했던 사람들에게 영원히 자신의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게 더 정당하다.

 

김기덕 감독의 말들을 들으니 독도 문제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할복을 시도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면 일본인들이 할복해야지, 왜 우리가 할복하는가. 나라면 주머니칼로 손가락 끝도 찌르지 않겠다. 김기덕 감독의 쓰레기 발언도 마찬가지다. 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모로 삼는가? 미워하고 싶다면 싫어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자. 아무리 힘들어도 반대로 행하지는 말자. 김기덕 감독의 반성을 촉구한다.

김연수/소설가

 

20060904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