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역에서 탄 택시가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 마을 입구에 멈췄다. 똑같은 모양의 집 10여 가구가 골목길 양쪽에 들어서 있었다. 어느 집이지? 평일 낮시간 햇볕 쨍쨍한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볼 데도 없다. 현대 문명에 너무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터여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휴대전화의 지도 앱을 열어 번지수를 찍었다. 목적지까지 125m. 길은 짧았지만, 온라인의 길을 오프라인에 맞추고 방향을 찾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길 끝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사람이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66·이하 호칭 생략)임을 금방 알았다. 때로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더 편리하고 정확하다.
박홍규는 철저하게 아날로그적 인간이다. 자동차도 운전면허증도 없다. 자전거를 타거나 웬만하면 걷는다. 먼 곳을 오갈 때는 고속열차(KTX) 등 빠른 것보다는 무궁화호 등 느린 것을 좋아한다. 해외여행도 가급적이면 비행기보다 배를 이용한다. 휴대전화는 아예 없고, 인터넷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번 인터뷰도 섭외부터 만남까지 모두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느리긴 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여생의 과제, 초암평화사상연구소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와 부인이 가꾸는 텃밭을 먼저 가자고 요청했다. 1999년 이 곳으로 이사온 뒤 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재료가 나오는 박홍규 삶의 터전을 보고 싶었다. “매년 산에서 낙엽 썩은 부식토를 가져와서 땅에다 넣었다. 이제는 완전 유기농으로 자리잡았다. 땅 속에는 지렁이와 두더지 천지이다. 인근 논밭은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니까 동네 두더지가 전부 이 밭으로 몰려드는 것 같다. 하하.”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검은 빛이 감도는 흙은 이 땅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호박, 박, 오이, 고추, 땅콩, 고구마, 들깨 등 서로 어울리거나 따로 자기 자리를 잡은 다양한 작물들로 인해 600평의 밭이 그다지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600평은 그가 정한 소유의 한계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사람에게 300평씩 돌아가는 것으로 계산되자, 자신과 부인 몫을 합한 크기만큼만 땅을 샀다. 밭 입구에 있는 허름한 농막도 그가 손수 지었다. 황토 흙을 개어 벽돌을 만들고, 버려진 목재를 주워 틈틈이 만들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더미 속에 양파와 마늘 등 수확한 농산물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책은 보관할 데가 없어 가져다 놓았다. 양파와 마늘은 여기에 보관하면서 1년 내내 먹는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집 안으로 옮겨 자리를 잡자, 부인(서현숙·67)이 직접 만든 음료를 내왔다. 부부가 텃밭에서 키운 매실과 비트로 만든 효소라고 했다.
-지난 2월 정년 퇴직을 했는데 요즘도 늘 학교에 가나.
“낮에는 매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 오늘은 공영형 사립대와 관련한 회의에 참석했다. 제가 오랫동안 관여해온 문제여서 빠질 수 없었다.”
영남대는 상지대, 조선대 등 문제가 많았던 다른 사립대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공영형 사립대로 전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내년도 공영형 사립대 예산을 전액 삭감함에 따라 이들 대학이 크게 낙담하고 있다. 박홍규는 정부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공영형 사립대는 어빠진 사립대를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데 사립대 개혁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까봐 걱정스럽다”며 비판과 우려를 표시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가 17일 낮 경북 경산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명예교수로 강의는 맡고 있나?
“아니다. 시간강사가 50%를 넘는데 퇴직 교수가 강의하겠다고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 자리를 뺏는 것이다.”
그는 요즈음 경산 압량을 평화사상 연구의 메카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그동안 혼자서 주로 공부해왔다면 앞으로는 연구소를 만들어 뜻맞는 사람들과 평화에 관한 연구를 할 계획이다. ‘초암평화사상연구소’라고 이름도 지었다. 선친의 호(초암)에서 따 왔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남긴 작은 유산의 일부가 종잣돈으로 쓰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생 성실한 교육자로 살다간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이 갖는 평화정신을 기리는 뜻도 담았다. 집 옆 공터나 텃밭에 40평 규모의 2층짜리 연구소 건물을 세워서 1층에는 연구실과 강의실, 2층에는 자료실과 전시실을 꾸밀 계획이다. 전시실에는 간디와 톨스토이, 마틴 루서 킹, 본 회퍼 등 평화사상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걸 생각이다.
-왜 하필 평화사상이냐?
“사실 가장 기본은 자유다. 평소 제 생각이나 철학은 자유로운 개인이 모여서 자율적인 사회를 만들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라는 말은 너무 진부하고, 또 자유사상연구소라고 하자니 우익단체처럼 들리더라. 제가 강조해왔던 삼자주의 즉, 자유와 자치, 자연을 포괄하는 게 뭘까 생각했더니 평화로 집약되더라. 물론 전쟁과 평화라는 식의 정치학적인 논의에는 저는 관심이 없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상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평화사상 저널도 발간할 계획이다.”
-연구소에 연구원도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돈도 꽤 들텐데.
“제 꿈은 베트남과 인도의 친구 하나씩을 포함해 서너명의 동학을 여기에 모으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 앉아서 대화하고, 사람들과 만나 공부하는 것이다. 돈은 없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반 일리치가 멕시코에서 일종의 학문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리치의 공동체에서는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사람도 오히려 돈을 냈다. 그런데도 전세계의 진보인사들이 몰려들었다. 일리치처럼 사람들을 모을 능력도 없고, 그동안 인간관계를 너무 소흘히 해서 걱정이긴 하다.”
학교와 병원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스템과 체제를 비판했던 이반 일리치(1926~2002)는 1960~70년대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서 대안 학문공동체인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운영했다. 여기서 함께 생활한 폴 굿맨과 도스 산토스 등이 2000년대 미국이나 유럽, 남미의 진보 사상을 주도했다.
-인간관계는 일부러 안 맺지 않았나.
“그렇다. 하하. 이런 거 할려니 사람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데 별안간 변신은 안 되고 어려움이 있다.”
-변신하면 선생님의 본질을 잃을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 하하. 연구소도 소박하게 하겠다.”
“시스템적인 인간이 아니어서 사회 변화를 위한 대안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능한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박홍규 명예교수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는 고독사를 꿈꾼다”
박홍규의 삶은 소박하고 단촐하다. 새벽 2~3시쯤 일어나면 아침까지 글 쓰고, 밥 먹기 전에 텃밭에 가서 일한 뒤 아침을 먹고는 학교로 간다. 저녁에는 돌아와서 밥 먹고 보통 8시쯤 잔다. 혈연과 학연, 지연의 줄은 찾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끊어버리고 산다. 가족이나 친족 안에서도 ‘이단아’다. 각종 동창회나 회식 등 사교 모임에도 일절 가지 않는다. 책 친구, 생각 친구는 있어도 죽마고우니 동창 친구는 없다.
-선생님은 삼자주의 가운데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관혼상제에 안 가고, 동창회 안 가고 하는 정도일 뿐이다. 일부러 그런 곳에 안 끌려가고 혼자 산다. 그런데 혼자 사는 것은 굉장히 쓸쓸한 것이다.”
-외롭다는 뜻인가?
“외롭다는 표현은 안 맞다. 외로우려면 심심해야 하는데 제가 할 일이 워낙 많고 재밌는 게 많아서 전혀 심심하지는 않다. 책이나 영화 볼 것도 많고, 외국 다닐 일도 많다. 사람들을 안 만나서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면 더 외롭고 괴로운 거 아니냐.”
-보통 사람들은 동창회나 회식 등을 썩 좋아하지 않더라도 빠지려고 하지 않는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왕따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젊은 학생들을 보면 친구가 없는 것이나 왕따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 같더라. 집단 속에 들어가야 안심이 되고, 사는 느낌을 가지는 것 같다. 나는 언젠가 그런 책을 쓰고 싶더라. ‘친구 없어도 괜찮아. 불알친구 없고, 계 없고, 동창회 안 가고, 에스엔에스 안 해도 괜찮아.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얼마 전에 중학생이 에스엔에스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자살을 했다고 하던데 제발 그런 것 때문에 소중한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흔히 친구 친구 하는데 로마 철학자들은 우정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또, 사람들이 고독사를 굉장히 문제시하는데 나는 고독사하고 싶다. 집사람한테도 ‘나중에 아프면 집을 나가 산꼭대기에 가서 고독사할 것이니 찾지 말라’고 가끔 말한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고독사는 다른 차원 아닐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죽음의 미학을 논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다만, 꼭 무리지어야 하고, 그게 아름답고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양 하는 것은 황당하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까지 그런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
-고독해도 괜찮아라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보통사람이 행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외롭게 사는 게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외로운 것도 해볼만 한 일이라는 얘기를 누군가는 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한테는 말이다. 그 점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이 할 말이 많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외로움을 즐기고, 혼자 사는 방법을 아는 데는 도사들이다.”
어릴 적 사진 몇장 구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에 그는 24일 “찾을 수가 없다”면서 아래와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중고교 때 별명이 ‘데카당’이었고, 미술실에 처박혀 외톨이로 살았어요. 그 뒤로도 평생 외톨이로 살았네요.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할 것도 없지만, 외톨이로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더러운 세상에서 자발적 왕따로 살라고 용기를 주고 싶어요.”
원고료 안 받는 저자
박홍규는 흔히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되는 ‘아나키스트’다. 중고교 시절 읽은 신채호의 책에서 영향을 받고,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1912~1997)을 만난 게 계기였다.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하기락은 고등학생에 불과하던 박홍규를 동료처럼 “정중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인 아나키즘을 알게 해줬다. 지금은 탈퇴했지만, 한국 아나키즘학회 회장도 한때 맡았다.
-고등학교 때 형성된 생각이 지금까지 사상의 지주로 있는 건가.
“그렇다. 학창 시절에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정권에 대한 저항 이런 차원의 것 말고, 좀 더 근본적인 게 뭘까를 고민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일제시대 때는 사회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고, 해방 이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했던 분이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는 보수적으로 변하더라. 사람들이 왜 저렇게 변할까 고민하다가 저한테 잡힌 게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근본적인 얘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국가보안법과 노동관계법 등 사상에서의 국가주의나 교육에서의 국가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강해서 공부를 할수록 아나키즘 쪽으로 쏠리더라.”
-변하지 않고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는 비결이 뭔가.
“일관됐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 나름대로는 굉장한 부침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니체든 톨스토이든 그들에 대한 제 인식은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욕했다가 등등의 변화가 많았다. 또, 지금도 이게 답인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한다. 아나키즘은 딱 정해진 것이 없고, 사상가 나름대로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그 중에 제가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톨스토이나 간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 정도다. 그들은 폭력주의를 배격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서의 아나키스트인가.
“그렇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질서하고 무책임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나키즘은 무법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법이나 도덕 등 규범과 오히려 잘 통한다. 전제 군주나 지배층의 폭력에 저항하다가 불법이나 무법자라고 낙인찍힌 아나키스트는 있지만, 스스로 살인이나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전혀 없다. 오히려 아나키스트일수록 철저히 평화와 질서를 끔찍하게 지킨 사람들이다.”
박홍규 명예교수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닌다. 먼 길을 갈 때도 가능하면 무궁화호나 배 등 느린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박 명예교수가 2005년 6월 자전거로 등교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평화주의자로서의 박홍규의 삶은 책이다. 그는 <윌리엄 모리스 평전>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저, 번역) <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치 저, 번역) 등 지금까지 모두 150권이 넘는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자신의 전공인 노동법이나 법학과 관련된 책은 오히려 소수다.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문학, 예술 분야를 망라한다. 프랑스 철학자인 미셸 푸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플라톤과 니체,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민주주의 관점에서 재평가했다. 가히 통섭의 지식인, 르네상스형 인간이라고 부를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서든 저서든 책이 교수 평가의 척도가 아니어서 논문 쓸 시간만 잡아먹는 방해물로 취급받기 일쑤다. 대개의 교수들은 할당된 논문을 채우느라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은 쓰고 싶어도 못 쓰더라. 그런데 선생님은 매년 평균 3~4권을 썼더라.
“제 책이 다 시시하다. 하하. 교양적이고 계몽적인 차원의 책이다. 그래서 저는 어떤 책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권위나 가치를 인정받고 싶지도 않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렇게 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냥 읽어주는 사람이 한두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냈다. 출판 불황에도 써달라고 요청하는 출판사가 다행히 있으니 앞으로도 제 힘 닿는 데까지 쓸 생각이다.”
-선생님의 책은 사상의 지평을 넓혀주고, 일반 통념과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는 식의 비판적인 읽기를 가르쳐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공이 아닌 분야의 책을 낼 생각을 어떻게 했나.
“제가 원래 잡독을 한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지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읽다 보니, 국내에도 꼭 소개가 됐으면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사이드나 윌리엄 모리스 등이 대표적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고는 이 책을 번역 좀 하라고 영문학 전공자들한테 얘기를 했는데 바빠서 그런지 아무도 안 하더라. 할 수 없이 나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나섰다.(1991년 첫 출간)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됐는데, 그때부터 전공이 아닌 분야도 과감하게 뛰어들게 됐다. 하하.”
그는 인세나 번역료 등 원고료를 챙기지 않는 저자로도 유명하다. 한 두 권 빼고는 모두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냈으며, 그 경우 대부분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
-원고료를 안 받은 것은 출판사를 돕기 위해서인가.
“그렇게 말하면 교만한 것이다. 나야 월급 받는 교수니까 원고료가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 책을 낼 때는 노동자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제가 1980년대 창원대학에 있을 때 밤에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했다. 그때 강의 중간 중간에 비틀스의 ‘이매진’이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들려주고, 고흐의 그림도 보여줬다. 실제로 고흐는 노동자를 좋아했고, 자기 그림이 노동자들의 거실에 걸리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베토벤도 마찬가지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나도 노동자를 위한 책을 쓰자고 결심했다. 그들이 책을 사 보려면 가격이 조금이라도 싸야 하지 않겠나.”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왼쪽)가 17일 경북 경산 자택 인근의 텃밭을 둘러보면서 기자에게 작물을 설명하고 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전태일과 5·18에 대한 속죄의식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뭔가.
“많이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시골에서 조용하게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시에서 번잡하게 살면 글 쓸 시간이 없겠지만, 여기서는 매일 새벽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박홍규의 독서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향 구미를 떠나 중학교(대구중)를 대구로 진학한 그에게 헌책방은 지적인 파라다이스였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부친은 그에게 용돈 없이 통학 버스비만 줬다. 박홍규는 달성공원 뒤쪽에 있는 고모집에서 학교까지 먼 길을 걸어서 아낀 버스비로 중고책을 한권씩 샀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사서 읽은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당시 책 제목은 <운명의 별이 빛날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유명 화가들의 일본어판 화집도 열심히 샀다. 그 화집을 보기 위해 혼자 사전을 들고 일본어를 익혔다.
고교(경북고)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함께 아예 학교 앞에 아틀리에를 차려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각종 책을 읽었다. 책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눈뜬 그는 고 3 때(1969)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했다. 이 때문에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결국 대학 입시에 두번이나 실패했다.
재수 때도 교과서나 수험서가 아닌 철학과 사상, 문학, 예술서를 끼고 살았다. 책이야말로 스승이었다. 1971년 영남대 법대에 입학했을 때 그는 이미 스스로 성장한 운동권이었다. 책과 함께 독재정치가 빚은 암담한 현실이 그를 키웠다. 경상도의 젊은 청년을 아무도 공부하지 않았던 노동법 전공으로 이끈 것은 근로기준법을 들고 분신한 전태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당시 캠퍼스 분위기에 따라 노동법보다 마르크스를 더 열심히 읽었다.(<젊은 날의 깨달음>, 2005, 인물과사상사) 각종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그는 4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의 영남대 총책으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거물이었나.
“전혀 아니다.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사람들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 사건을 키우기 위해서 그들이 엮은 것이다. 영남대는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몇명 안 돼서 제가 눈에 띄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학생운동에 제 딴에는 열심히 참가했고, 4학년 때부터는 노동자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보고 노동야학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0년 광주의 5·18 비극도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줬다. “(1982년 오사카시립대에서 공부할 때) 지금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그 곳에서 만난 전라도 친구들에게 무조건 경상도 군인들(전두환 노태우 등)이 저지른 5·18의 용서를 울면서 빌었다는 점이다.”(<젊은 날의 깨달음>)
그러나, 박홍규는 기본적으로 행동가가 아니라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혁명가나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학자의 길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웠다.
“이 사람은 대학 때부터 직접적으로 리더가 되는 성향의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학보사 기자를 했었는데, 학교 신문에 이 사람이 논문이나 시국에 관한 긴 글을 자주 실어서 꽤 유명했다. 학생으로서 글을 아주 잘 썼지만, 그 때도 자기 세계에 빠져 있었다. 데이트할 때 한번은 제가 프랑스 화가인 로렌셍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여러 화집에서 로렌셍 부분만 찢어서 책을 만들어줬다. 또, 사르트르를 얘기하면 사르트르에 관한 수십권의 책을 가져다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부인 서현숙)
박홍규는 1981년 모교의 노동법 전임 교수 모집에 최종 후보로 올라갔지만, 박근혜가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 영남대는 시위 전력을 들어 그를 탈락시켰다. 마침 그해 4년제로 승격한 창원대가 이 젊은 학자를 전임교수로 채용했다. 그는 박근혜가 떠난 영남대로 돌아올 때(1991년)까지 10년간 노동자 도시인 창원에서 대부분 활동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야간에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강의를 하는가 하면 노조 결성을 도왔다.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창원에 있을 때였다. 텃밭 가꾸기 등 생태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창원에서였다.
—1999년 대구의 집을 정리하고 경산으로 이사올 때는 단순한 주거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결심에 따른 것이라던데.
“그렇다. 올해도 몇십년 만에 가장 덥지만, 1998년에도 제 기억에는 몹시 더웠다. 그 여름을 지나면서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셋집을 정리하고 이 곳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정말 한적한 시골이었다. 시골에서 차 대신에 자전거를 타고, 동물을 키우고, 주경야독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자유와 자치, 자연이라는 삼자주의의 실천을 꿈꿨다. 60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건 시골에서 산 거다.”
그는 지금도 수염을 한달에 한번씩 가위나 바리캉으로 스스로 자른다. 머리도 집에서 가끔 깎는다. 목욕도 자주 하지 않고, 씻을 때는 비누만 사용한다. 그의 부인도 평생 화장을 하지 않는다. 자기 몸을 가꾸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은 유한계급이 남긴 나쁜 유산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지구 생태계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윤리적 삶의 실천이다.
—삼자주의 중에 자유로운 개인, 자연과 어울리는 삶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치는 어떤가.
“처음에 여기 올 때는 마을도서관을 열고, 일종의 대안학교인 자유학교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학교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랬나.
“그것보다는 마을사람들과 친해지기가 참 어려웠다. 새로 조성된 이 마을은 거의 외지인으로 여기서 잠만 자고 대구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어서 서로 얼굴 보기도 어렵다. 또, 저쪽의 원래 마을은 농사짓는 사람들인데 만나면 ‘공주님’(박근혜) 얘기만 하니까 대화가 안 된다. 처음에는 막걸리를 사들고 가서 대화하려고 노력했는데 솔직히 힘들더라. 앞으로 연구소를 짓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와서 영화도 같이 보고 음악도 듣고 얘기도 할 수 있을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박홍규 명예교수의 유기농 텃밭 입구. 오른쪽 건물은 그가 직접 빚은 벽돌과 폐자재로 손수 지은 농막이다. 안에는 책과 올 봄에 수확한 양파, 마늘 등이 보관돼 있었다. 경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들 서울로 모이는 게 새 문제”
—올초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인 웹 부부의 책(<산업민주주의>)과 함께 그 두 사람 평전을 펴냈다.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찾은 건가.
“하나의 대안이긴 한데 우리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는 사회 체제를 바꾸는 정책적인 대안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고, 그런 시스템적인 사고에 익숙하지도 않다.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한번도 이게 대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질에 미친 사회에서는 오히려 삼자주의가 공소하고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하기에 우리는 누구나 생태와 환경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안이라는 것은 가능한 이렇게 소박하게 살고, 가능한 걷고, 가능한 낭비하지 않고 사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문화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삶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조금씩이라도 대안적 생활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꽤 나오기는 하는데 다들 서울로 모인다는 게 또다른 문제다.”
두어시간 남짓이면 충분하겠지 했던 인터뷰가 4시간을 훌쩍 넘겼다. 준비한 질문 하나는 꺼내지 않았다. 영남지역 진보인사 일부가 제기하는 ‘말만 진보이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관한 물음이었으나, 꺼낼 필요를 못 느꼈다.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책으로 또 삶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언제던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왕따를 즐기는 지식인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원하면서 그의 집을 나섰다.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society/area/859178.html#csidx30c971b0569965a9f3dbd56d0617e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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