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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길

서귀포 원도심을 가다

by 오직~ 2018. 7. 18.

제주도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다. 제주시에서는 서귀포 사람을 ‘촌따이’라 말하고, 서귀포에서는 제주시 사람을 ‘시에따이’라고 부른다. 제주 말로 촌따이는 ‘촌사람’, 시에따이는 ‘도시 사람’을 뜻한다. 제주시에는 도청, 대학, 공항 등 관공서 및 주요 기관이 있어 서귀포 사람이 제주시에 가는 일은 흔하지만, 제주시 사람이 서귀포를 찾는 일은 많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이사한다면 출세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차로 1시간 거리로 물리적으로 멀지 않은 두 곳이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그 이상이다. 두 도시 사이에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자연적으로나 인문학적으로나 지역 차이가 뚜렷하다. 이 작은 섬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겠지만,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곳이 한라산으로 나뉜 제주시와 서귀포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쪽이 완만한 지형이라면 남북 쪽은 경사진 지형이다. 특히 북쪽보다 남쪽이 더욱 가파르니 유독 계곡과 폭포가 많다.

육지와 가장 가까웠던 제주시는 탐라 시대부터 제주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반면 서귀포는 한라산으로 가로막혀 고립된 지형 탓에 오랜 시간 정의현(성읍)에 속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1916년에 이르러서야 경찰관 주재소, 학교, 우편소를 설치했고, 어선 공장과 통조림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서귀포시가 된 것은 1981년 서귀읍과 중문면이 합쳐져 시로 승격되고,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하면서 남제주군과 서귀포시가 통합되면서다. 서귀포의 면적은 870.70㎢로 제주시 면적 978.32㎢에 비해 조금 작지만, 인구는 16만4000여 명으로 제주시의 45만900여 명의 1/3수준이다.

제주시보다 역사가 짧고 인구도 적지만,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기후와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은 서귀포는 명실상부한 관광 1번지다. 서귀포에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즐비하다. 기암절벽에서 세찬 물줄기가 떨어지는 천지연폭포,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인 정방폭포, 상록수림이 울창하고 맑고 차가운 용천수가 일 년 내내 흐르는 돈내코, 천연 해수풀로 유명한 황우지 해안, 50~60m의 해안 절벽과 고운 모래를 자랑하는 서핑 천국 중문 해수욕장 등이 대표적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름다운 서귀포를 화폭에 담은 화가 이중섭, 변시지의 예술혼까지 느낄 수 있는 곳까지, 서귀포는 도시 그 자체가 제주도의 랜드마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소가 많아 여행자들은 서귀포를 꼭 한 번은 거치지만, 대부분 서귀포의 진짜 이야기는 보지 못하고 지나간다. 여행객들도 제주시 사람만큼 서귀포를 모를 수밖에 없다. 서귀포의 미학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원도심에 있다. 오랜 시간 고립된 탓에 고스란히 보존된 자연환경, 세상의 변화에 잠시 비켜 서 있는 오래된 건물과 골목들, 그리고 서귀포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흔적과 낙천적인 삶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제주다움’과 ‘서귀포다움’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서귀포 원도심이다.

솜반천
솜반천
  
서귀포시 서홍동에는 아름다운 솜반천이 있다. 솜반천은 5.5㎞의 내천으로 사계절 용천수가 흐르고 주위가 숲으로 둘러싸인 도심 속 하천이다.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해 ‘선반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독 이곳의 물이 맑고 차가운데 한라산에 내렸던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이곳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물의 온도가 한여름에도 15~17도를 유지할 정도로 차갑다. 여기서 솟아오른 물들이 흐르고 흘러 천지연폭포의 거친 물줄기가 된다.

지중해 보다 이국적인 서귀포 항구, 낚싯대 드리운 강태공

솜반천은 특히 아이들의 기억을 품은 곳이다. 지금은 상수도가 정비돼 흔적을 감추었지만, 과거에는 천연 수영장이었던 물웅덩이가 많았다. 종남소와 고냉이소가 대표적인데, 수심이 5~6m가 넘었지만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 푸르고 깨끗했다. 어린 시절, 여름이 되면 친구들과 팬티 바람으로 물웅덩이에 뛰어들었다. 몸이 차가워지면 여름 해에 달궈진 바위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그렇게 물과 바위를 몇 번 오가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솜반천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걸매생태공원’과 ‘걸매예술마을’이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걸매생태공원은 솜반천 주위 170여 종의 식물과 습지성 초본류, 야생화초류, 매화 군락 등 다양한 식물과 흰뺨검은오리, 직박구리, 박새 같은 조류를 관찰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원이다. 걸매생태공원 동남쪽에 있는 가파른 언덕 계단을 지나면 걸매예술마을이 나온다. 마을 건물들이 대부분 70~80년대 지어져 동네 곳곳에 좁은 골목길이 많다. 몇 해 전 골목길에 예쁜 벽화를 그리고 마을 곳곳에 작고 소소한 예술 작품을 설치해 더욱 운치 있고 아름다운 마을이 되었다.

기당미술관
기당미술관
  
걸매생태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당미술관이 있다. 흔히 서귀포를 대표하는 작가로 이중섭을, 대표 미술관으로 이중섭미술관을 떠올리겠지만 서귀포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민들은 변시지(1926-2013)와 그의 작품을 소장한 기당미술관을 첫손에 꼽는다. 변시지 화백은 서귀포를 배경으로 사람, 새, 말, 초가를 주로 단순하게 형상화해 그렸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서귀포의 외로움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온다. 기당미술관은 제주에서도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현지인들만 아는 비밀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매일올레시장의 과일
매일올레시장의 과일
  
원도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단연 향토시장, 60년 전통의 매일올레시장이다. 서귀포시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하루 이용객만 1만2천 명이고, 70%가 여행객일 정도로 서귀포 대표 명소다. 생선과 과일, 육류, 야채, 산나물, 의류, 잡화, 토산품 등 없는 게 없다. 먹거리도 다양하다. 그중 성시경이 꼭 먹어보라고 한 오메기떡, 보리로 만든 제주식 팬케이크 빙떡, 만두, 김밥, 김치전 등이 떡볶이와 같이 나오는 서귀포식 떡볶이 모닥치기도 별미 중의 별미다.

매일올레시장의 은갈치
매일올레시장의 은갈치
  
매일올레시장은 서귀포에서 가장 ‘핫한’ 거리 이중섭문화거리와 이어져 있다. 올레시장에서 남쪽으로 5분만 걸으면 된다. 전쟁과 광기의 시대, 1951년 1월 이중섭은 원산에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난을 와 지금의 이중섭문화거리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1년 남짓 머물렀다. 이중섭이 머물던 생가를 중심으로 미술관, 공방, 소규모 갤러리와 창작공간, 카페, 음식점, 벽화, 그리고 여행자 쉼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화가 이중섭이 살던 서귀포 집의 방
화가 이중섭이 살던 서귀포 집의 방
  
하지만 시민들에게는 이중섭보다 서귀포극장(아카데미극장)으로 유명한 거리다. 구 서귀포극장은 1962년 현무암과 시멘트로 지어진 제주식 건축물이다. 지금은 문화 공간으로 쓰여 그때의 흔적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과거 서귀포의 유일한 극장으로 현지인들은 이곳에서 영화를 보며 섬 밖의 세상을 꿈꾸었다.

서귀포 시민의 여름나기가 궁금하다면 소정방폭포로 가보자. 소정방폭포는 정방폭포에서 동쪽으로 500m 떨어져 있는 곳으로 바닷가와 맞닿아 있다. 5m 높이의 기암절벽에서 10개의 거친 물줄기가 떨어진다. 이곳의 물 또한 땅속에서 올라온 용천수로 정말 차갑고 깨끗하다. 폭포수에 1분만 노출돼도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오래전부터 현지인들은 이 물줄기로 천연 마사지를 하며 여름을 견디고 즐겼다.

소정방폭포
소정방폭포
  
서귀포의 남쪽 끝 서귀포 항구에 앉아 있으면 유유자적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 뒤로 작고 아담한 서귀포의 원도심, 푸른 바다와 폭포, 기암절벽, 넉넉한 품으로 도시를 감싼 한라산이 눈에 잡힌다. 그 모습은 지중해 도시만큼 이국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시간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쯤 되면 서귀포 사람을 ‘촌따이’가 아니라 ‘파라다이스따이’(파라다이스 사람)이라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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