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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쇼룸이 아니다 - 조성룡

by 오직~ 2018. 7. 1.

윤수일의 ‘아파트’가 카세트테이프 노점상들의 스피커를 타고 거리마다 흘러넘치던 1982년, 서울의 강남 일대는 새로 조성되는 아파트 단지들과 그 단지들을 잇는 지하철 2호선 공사로 부산스러웠다. 지하공사장을 덮은 철근 상판 위로 자동차들이 덜컹이며 지나갔고, 신축학교 앞 비포장도로 위로 흙먼지가 회오리를 치면 학생들은 실눈을 뜨고 종종걸음을 쳤다. 골목 바닥에 분필 자국을 내며 놀던 아이들은 아파트 놀이터를 새로운 아지트로 삼았고, 밤이 되면 그 놀이터 벤치에서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연인들이 도란도란 얘길 나눴다.

어느덧 윤수일의 아파트를 열창하던 청춘들은 반백이 되었다. 아파트 단지에 심어진 나무들도 둥치가 굵어져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는데 이제 놀이터에 오는 아이들은 반으로 줄었다. 세탁소와 정육점과 미용실의 오랜 단골들이 식구들 안부를 물을 만큼 친숙해질 즈음, 단지 입구에 어느 날 현수막이 내걸린다.


“경축, 구조안전진단 통과!”


아파트가 구조안전진단에서 통과할 만큼 튼튼하니 축하할 일이란 뜻이 아니다. 여기서 ‘통과’란 ‘오매불망 바라던 대로 구조안전검사에서 탈락해서 재건축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통과’라 쓰고 ‘탈락’이라 읽는 것도 신기하지만, 자기가 살던 아파트가 헐리게 되었다고 경축 현수막까지 내거는 역설을 외지인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윤수일의 ‘아파트’는 시대별로 리메이크되어 장수하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30년을 넘기기 어렵다. 건물이 단단하면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대체 우리 아파트는 왜 이렇게 튼튼하게 지은 거야?”


아파트는 삶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재테크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아파트에 하자가 발생하고 부실공사의 증거가 발견되면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세라 일제히 입단속을 한다. 주변을 압도하는 스펙터클로 우뚝 솟은 아파트는 경외의 대상이 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쇼룸의 마네킹처럼 ‘풍족한 중산층’의 로망을 재현하는 배우가 된다. 보여주기 위한 주택, 보이기 위한 삶을 위해서 공간은 깊어지고 삶은 공허해진다. 내 인생과 내 가족과 내 이웃의 애틋한 발자취가 담긴 아파트 오솔길, 낡은 벤치, 나와 함께 나이 먹은 느티나무의 추억은 둔중한 불도저 아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왜 그렇게 오르려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죽을 힘 다해 기어오르는 애벌레들처럼, 우리는 더 넓고 높은 곳에 내 명의의 주택을 가지기 위해 평생 한 뼘씩 기어오르다가 끝내 한 평 땅속에 묻힌다. 우린 그 위에 어떤 현수막을 내걸까. “경축, 인생무상 체험 통과?”


건축가 조성룡(74)은 오랫동안 집의 의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해왔다. 2011년 국내 건축 전문가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1위로 선정한 선유도공원의 설계자이며, 2013년 건축가 100명이 뽑은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20위’에 최다 선정된 (선유도공원, 꿈마루, 의재미술관) 건축계의 원로. 한국건축학교 교장으로 10년을 재직하며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건축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교육자.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잘 알려진 정기용의 마지막 생애 5년을 함께하며 공공건축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구현해온 비주류 건축계의 대표 인물. 그가 최근 <건축과 풍화>(수류산방 출간)라는 책을 냈다. 칠십 평생에 처음 내는 책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공간의 의미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상품화되어 왔는지 찬찬히 되짚는다.


“나라에서 지은 최초의 아파트가 1963년에 주택공사에서 지은 마포아파트인데 준공하는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와서 치사를 해요. ‘이게 우리가 바라던 생활의 핵심이어야 되고, 앞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 좋은 삶이다.’ 정치하는 사람이 물질의 표준을 정해 버리는 거죠. 정신적인 지향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본보기를 드러내는 겁니다.”(<건축과 풍화>, 조성룡 구술, 심세중 엮음. 20~21쪽)


날 건축가라고 하지 마세요

지난 21일 찾아간 서울 팔판동 그의 작업실은 서울 한복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즈넉하고 인적 드문 골목에 면해 있었다. 경복궁 담장을 마주보며 청와대 입구 초소 바로 뒤에 자리해서인지, 지나는 차 소리, 사람 소리도 뜸했다.


“날도 좋은데 여기 앉을까요?”


그가 옥상 위 야외 테이블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마침 하지였다. 서쪽 하늘로 해가 길게 누우면서 제법 선들선들한 산바람이 불었다. 우리가 자리한 3층 옥상보다 더 크게 자란 느티나무가 옥상 위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편안하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분이신데, 그간 책을 내신 적이 없더군요. 이번에 나온 책에서도 선생님 개인사에 얽힌 얘긴 찾기가 어려워요. 저 같은 인터뷰어에겐 굉장히….


“불친절한 책이죠?”


―하하, 솔직히 그렇습니다. 심지어 책 말미의 연표에도 선생님 생애 연표가 아니라 ‘조성룡도시건축’의 ‘주요 작업목록’만 연도별로 나와 있어요.


“제가 원래 남 앞에 잘 나서질 못하고 쭈뼛쭈뼛 자기 얘길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웃음)”


―그런데 ‘작품’목록이라고 하지 않고 왜 ‘작업’목록이라고 하십니까? 이 책에 작품이란 표현은 한 번도 안 나오는 것 같아요.


“작품이 아니라 그냥 작업이죠. 돈 받고 하는 작업. ‘아, 그거 정말 예술이다’라는 말은 후대에 다른 사람들이 평할 일이지, 자기가 스스로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우스워요. 내가 혼자 단독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스태프들과 같이 일하고 시공회사가 완성해주는 건데 그걸 어떻게 (자기) 작품이라고 하죠? 그래서 전 스스로 건축가라고 말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건축가가 아니면 뭐예요?


“건축사죠. 국가에서 준 면허를 가지고 내가 의뢰받고 위임받은 일을 법규와 예산에 맞춰서 진행하는 건축사.”


―우리가 통상적으로 건축사라고 하면 엔지니어를 말하잖아요. 건축가라고 하면 뭔가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고.


“원래 영어의 아키텍트(Architect)는 의사나 변호사처럼 면허가 있는 사람을 말해요. 그걸 우리나라에선 건축가라고 번역하죠. ‘면허와 무관하게 자기를 예술가로 규정하는 사람들’로 의미가 바뀌어 버렸고요. 내가 생각하는 내 직업은 ‘건축사 면허를 가지고 사람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일이에요. 잘못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거든요. 음… 이런 적이 있었어요. 경찰에서 조사받으러 오라고 한 거예요.”


―언제요? 왜요?


“그러니까… 그게 1995년인데….”


그가 망설이다가 운을 뗀 얘기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종합사무소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큰 건물의 설계 용역을 맡을 때는 건축가 단독이 아니라 최소 3명의 건축가 이름이 필요했다. 삼풍 일을 맡은, 같은 사무실 동료의 부탁을 받고 별생각 없이 이름을 빌려주는 데 동의했다.


“형사가 질문을 하는데, ‘돈 받았냐?’ 그래서, ‘안 받았다’, ‘계약했냐?’, ‘안 했다’ 그러니까, ‘근데 여기 왜 왔냐?’ 묻더라고요. ‘당신이 불러서 왔다’고 하니까 형사가 껄껄 웃어요. ‘당신 바보냐? 돈도 안 받고 계약도 안 했는데 왜 도장을 찍어주냐?’면서…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직업인데 내가 별 자각이 없었던 거죠. 그러고 나와서 엄청 울었어요. 국가의 면허를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이 그 모양이었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별다른 혐의 없이 풀려났지만 그는 자괴감에 가슴을 쳤다. 건축사의 기본임무는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것이란 생각을 그때 뼈저리게 가슴에 새겼다. 지하에 매몰되어 구조만 기다리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 없어 삼풍백화점 설계도면에 따라 직접 지하구조물 모형을 만들어 경찰에 전달했다. 뒤늦게나마 뭐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구조에 도움이 되었겠네요.


“셋째 날에야 모형을 만들어 갖다줄 생각을 했으니 내가 모자란 놈이죠. 첫날 했으면 100명은 더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게 두고두고 가슴 아파서 세월호 때도 어렵사리 배 설계도면을 구해서 모형을 만들었어요.”


―잠수사들 참고하라고요?


“해경에도, 청해진해운에도 전화했는데 설계도면을 구할 길이 없어서 애태우다가 겨우 손에 넣었어요. 밤새도록 그걸로 모형을 만들어서 진도까지 내려가 해경에 전달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구조에 쓰인 게 아니라 보고용으로 쓰였대요.”


―뭐라고요?


“담날 청와대에서 전화 와서 하나 더 만들어 달래. 그게 왜 필요하냐고 하니까, 자기들도 보고용으로 쓰려고 한다고. 우린 보고용 만드는 사람 아니라고 하고 전화 끊었죠.”


아파트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진정성 없는 겉치레, 기본기가 결여된 허세를 그는 경계하고 경멸한다. 하늘과 땅 사이, 물과 흙 사이, 빛과 그늘 사이, 집과 집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따뜻하고 편안하도록 만드는 일. 그게 조성룡이 추구해온 ‘작업’이고, 그가 지향해온 삶이다. 그는 1983년 자신이 설계한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다. 아침이면 단지 앞 산책로를 걸어 나와 지하철을 타고 작업실까지 출근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햇빛과 나무와 하늘의 색깔을 보름에 한 번씩 사진으로 찍어서 지인들과 공유해온 지 벌써 6년째다.


―전, 유명한 건축가들은 모두 그림 같은 단독주택에 사시는 줄 알았어요. 왜 아파트에 사세요?


“아파트에 대해 흔히 사람들이 가지는 두 가지 상반된 편견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답게 사는 곳이 아니다’, 둘째는 ‘아파트가 돈을 번다’는 생각이에요. 둘 다 잘못되었죠. 아파트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여든 ‘실향민’들을 위한 거예요. 우리 아파트의 역사는 대략 40년 안팎이지만 원래 아파트, 공공주택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맞닿아 있어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도시노동자들이 생기면서 노동착취와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졌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상주의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평등하게 잘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사회적 유토피아’를 꿈꿔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집을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고 오랜 기간에 걸쳐 법과 제도가 바뀌면서 오늘날 유럽의 아파트 역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출발부터 노동자,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이 아니라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로 출발했어요. 오히려 노동자, 서민들이 살던 집을 대대적으로 철거하고 쫓아내면서 목동이나 상계동에 대규모 중산층 아파트가 지어졌죠.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마포아파트 축사를 할 때부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중산층의 표준’으로 아파트를 규정한 거예요. 처음부터 공공주택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거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파트라고 부르지만 법적인 용어는 공동주택인데, 이걸 통칭해서 ‘하우징’(housing)이라고 하거든요. 하우스(집)에 ‘-ing’가 붙어요. 집을 만들어서 ‘공급하는 것’까지가 다 포함되는 거죠. 도시에서 일하는 실향민들을 위해 그들에게 공동주택을 지어 공급하는 것.”


층수도 평수도 다양한 ‘마을’

―선생님도 실향민이세요?


“그럼요. 정말 실향민이에요.(웃음)”


그는 1944년 도쿄에서 출생했다.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 아버지는 일본 ‘미쓰비시’사에서 기계설계를 하는 엔지니어였는데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 나왔다가 해방을 맞았다. 도쿄 집에도, 영흥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롭게 정착한 곳이 부산이었고, 조성룡은 그곳에서 부산중, 부산고를 나왔다.


―건축가가 되겠단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아버님이 기계설계 기술자라서 어려서부터 아버님 제도판 밑에서 설계 도구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았어요. 아버지는 내가 공대 가길 원하셨지만 전 미대에 가고 싶었죠. 그 말 꺼냈다가 ‘무슨 3대 독자가 미대를 가느냐?’며 친척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아주 혼쭐이 났어요.(웃음)”


‘3대 독자 엄친아’ 조성룡은 결국 미대를 포기하고 공대에 지원했다. 62년 인하대 공대에 입학한 뒤 한 차례 전과를 거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졸업작품은 아파트였다.


―그때부터 서민 하우징에 대한 관심이 깊었나요?


“내가 무슨 노동자, 농민을 위해서 그런 대단한 생각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웃음) 그런 건 아니었고요. 건축하는 사람으로서 도시에서 큰 스케일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게 아파트가 아니었을까. 도심에서 모노레일로 이어진 김포평야에 30층짜리 고층아파트들을 짓는다는 상상을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지금의 마곡단지와 비슷해요.”


―50년을 앞서 가셨네요.(웃음) 30대 젊은 나이에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설계 같은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 건 그런 바탕이 있어서 가능했겠죠?


“전두환 대통령이 80년 5·18로 국내외 여론이 안 좋으니까 부랴부랴 올림픽 유치하고 아시안게임 유치하면서 국가적인 홍보 이벤트를 벌였어요. 난 그때까지 고층아파트 단지에 살아본 적도 없는데 1500가구 5천~6천명이 사는 대단위 공공주택 국제설계경기에서 당선이 된 거예요.”


―건축설계 공모전의 심사과정이 공개적으로 진행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고요?


“전무후무한 일이죠. 심사위원들의 기명 심사표와 심사과정을 다 공개하는 건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어요.”


조성룡의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설계는 다른 아파트 단지와 확연히 달랐다. 같은 모양, 같은 방향의 아파트가 직선으로 도열하는 구조를 벗어나서 각 동을 니은(S)자 모양의 ‘클러스터’(군집)로 만들고 하나의 클러스터 안에 작은 평수와 큰 평수 가구를 다양하게 넣는 ‘소셜믹스’(사회적 혼합) 형태를 취했다. 각 클러스터는 사이에 있는 주차장을 공유하도록 해서 각자 20~30미터 걸어가는 동안 주민들끼리 서로 마주칠 수 있는 접점을 만들었고, 해가 드는 방향을 고려해서 한 동의 층수도 9층부터 18층까지 차등을 두었다. 획일적이고 단선적인 성냥갑 모양의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주민들끼리 서로 섞이고 소통하는 공간을 연출하려 한 것이다. 그가 이런 파격적 설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한 것은 수많은 이농인구들이 고향을 떠나오며 잃어버렸던 ‘마을’의 복원이었다.



노숙인이 공원에서 자면 안 되나?

―왜 평수가 다른 집들을 섞어서 배치했죠?


“동네라고 할 때 ‘동’의 한자(洞)를 보면 물수(水) 변에 같을 동(同) 자예요. ‘같은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동네에 보면 부자도 살고 그보다 못한 사람도 살아요. 그런 사람들이 같은 길을 다니면서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마주치는 겁니다. 공동주택에서 소셜믹스는 필수입니다. 돈이 있건 없건 섞여 사는 게 자연스러운 삶이죠.”


―요즘 임대아파트는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왕따 취급을 받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거 참 심각하죠.(한숨) 중요한 건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관계하느냐는 거예요. 빈칸만 물리적으로 만들어놓고 사람들 모이게 하면 그건 운동장이지, 광장이 아니잖아요. 광장이 되려면 사람들이 같이 뭘 이뤄내려는 소통이 있고 연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의 부제가 ‘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인데,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도시란 뭡니까?


“우리가 비엔나(빈)를 가거나 베를린을 가면 ‘아, 좋은 도시다’ 느끼잖아요. 그건 집이 좋다기보다 그 집합체가 좋은 거예요. 집합체로서의 도시가 인간적이고, 저소득층을 위해 좋은 걸 제공하려고 하고, 공원을 하나 만들더라도 누가 쓸 건가를 배려하고… 나무 많이 심고 벤치 있다고 공원이 아니에요. ‘실향민’들이 자기가 살던 시골의 어느 숲길을 다시 느끼며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공원이죠. 그래서 봉건영주들이 갖고 있던 땅들을 시민사회가 되면서 대거 몰수해서 공원으로 만들잖아요. 그런 역사가 우리한텐 없는 겁니다. 우리 공원 가보세요. 벤치 가운데를 막아놨어요. 노숙인들이 누울 수 없게. 벤치라는 게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거지, 노숙인이 갈 데 없으면 공원 벤치에서라도 잘 수 있죠. 공원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데.”


2015년 조성룡이 참가했으나 2등으로 낙선한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의 제목은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서울역 고가의 아스팔트 일부를 잘라 하중을 줄이고, 차가 다니던 길을 다종다양하게 보행자가 걷는 길로 만들어 서울의 역사가 스며 있는 주변 건물이나 인도로 사통팔달 연결되게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하늘에 떠 있는 공원도 좋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살고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어야만 의미에 합당하다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에 깔린 뜻이에요. 역사를 공유하고 지형과 경관의 체험을 공유하는 이웃과 함께 사는 도시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 고가가 정립된다면 축복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어요.”(<건축과 풍화> 91쪽)


룸살롱을 따라가는 인테리어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웠던 ‘중산층 표준’이 우리 뇌리에 저주처럼 각인된 걸까요?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라고 불리려면 일단 ‘아파트 30평대 이상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요. 공간의 역사나 문화적 의미를 곱씹기 전에 일단 돈으로 환산하죠.


“아파트의 발달이 아주 이상한 쪽으로 간 거예요. 바닥에 대리석 깔고, 샹들리에 달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집 안에 홈바도 만들고, 룸살롱식 인테리어를 자꾸 주거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죠. 바닥에 물고기 왔다 갔다 하고.(웃음) 남한테 보여주기 식으로 만드니까 그래요.”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에선 어느 집에서나 식사하면서 삼각산 능선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하셨지만 요즘은 비싼 아파트가 조망권을 독점해요. 한강 가를 병풍처럼 둘러싼 아파트들을 보세요.


“조망을 독점하면 안 되죠. 건축들이 점점 높아지니까 뒷집들이 피해를 보잖아요. 최근 제가 작업하는 잠실5단지 재건축 설계에서도 서울시 지침은 그거였어요. 조망권을 위해서 한강에서 멀어질수록 층수를 높게 해라. 근데 다른 더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면 안 되죠.”


―그게 뭔데요?


“이 뒤쪽이 남쪽이란 말이에요.”


―네?


“한강에서 멀어질수록 층수를 높게 하라는데, 그쪽이 남쪽이라고요. 해가 들어야죠.”


―아!


나 또한 잊고 있었나 보다. 이건 보여주기 위한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걸. 한강이 보이느냐보다 중요한 건 채광과 통풍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해가 제일 짧은 동지 낮 1시를 기준으로 그림자 체크를 했어요. 앞 건물에 그림자가 가장 적게 드는 방식이 뭘까 이리저리 비교했죠.”

서울시 지침대로 하면 단지의 반 이상이 그림자로 가려질 판이었다. 일조 시간과 각도를 고려해서 동지에도 모든 집에 최소 2시간 이상 햇빛이 들도록 건물의 층수와 배치를 결정했다. 고층아파트 단지에서 바람이 회오리처럼 맴도는 와류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도 고민했다. 여러 차례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건물 높이가 자연스럽게 경사지도록 해서 바람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었다. 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미세먼지와 황사는 아파트 단지에 갇힌 채 뱅뱅 맴돌 것이다.


―지난 2일 조합원총회에서 선생님 설계안이 채택되었지만 여전히 이 설계에 반대하는 주민도 있다고요. 왜죠?


“채광이나 통풍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심지어 어떤 분은 난 50층짜리로 갈 사람이라서 자긴 어떻든 상관없대요.(웃음)”


―그분들이 원하는 건 뭔데요?


“커튼월(건물 외벽을 유리로 덮음) 방식의 외관 같은 거요. 번쩍번쩍하게! 그래야 근사해 보이고 집값도 오른다고 생각하시죠. 근데 상업시설도 아니고, 주거시설에 이런 공법은 부적절해요. 여름에 뜨겁고 겨울에 춥고, 바람 때문에 문도 못 열어요. 요즘엔 초고강도 콘크리트가 개발되어서 최근 뉴욕에 짓는 100층짜리 아파트는 모두 콘크리트인데 말이죠. 지진에도 피해를 줄일 수 있고 구조변경도 훨씬 용이해요.”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부 주민들의 오해와 수정 요구에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국제설계경기의 당선작으로 조성룡의 안을 발표하고도 정치적 눈치 보기로 명확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서울시에 대한 원망도 큰 듯했다.


―자기가 살 집이면서도 가격을 올려 받기 위해 건물의 외양에 치중하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이에요. 이게 설득한다고 달라질까요?


“개인적인 욕망이야 어쩔 수 없죠. 근데 그런 무한대의 욕망을 그대로 풀어놓는 게 아니라 정책을 통해서 바로잡는 게 국가의 의무죠. 어떤 주민들은 나더러 공공을 위해서 일하지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고도 한다는데 공과 사가 그렇게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게 아니에요. 공공은 공과 사가 서로 접점을 찾고 열려 있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욕망의 바벨탑처럼 하늘로 치솟은 고층아파트들 사이에서 우린 길을 잃은 게 아닐까. 화려하게 단장한 유리의 성 안에서 우리 삶에 정작 필요한 것들은 와류처럼 허공을 맴돌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1298.html#csidx6f0e711915d7cb1b370fa693ed68a7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