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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부산행 _ 연상호

by 오직~ 2016. 7. 21.

좀비, 바이러스, 재난, 불신 국가, 강압 통제, 이기, 인간성...

사랑, 가족애!!

 

 

 

 

감독 : 연상호 2016作

배우 : 공유, 정유미, 마동석, 최우식, 소희, 김의성, 김수안, 김창환

20160721서울극장

 

 

 

 

또다시 돌아온 대박 영화 일대격돌의 시즌을 맞이하여 <곡성>에 이은 또 하나의 불닭 영화 <부산행>이 도착하였다. 일단 예고편, 클립 등을 잠깐만 보아도 파악 가능한 것처럼, <부산행>은 좀비의 완전 국산화에 마침내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드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달성해냈다. 더불어 이제껏 국산 좀비영화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우리 동네 로컬 좀비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한반도를 삽시간에 뒤덮는 전국구 좀비로 재난영화적 규모 내지는 문명 종말처리적 규모까지 과감하게 추구해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2시간 내내 고속철 객차 가득 메운 좀비를 관람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및 체력부담에 대한 우려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여, 우선 이 영화의 ① 피서무비적 기능성 대비 관람 스트레스 간의 대차대조가 필요할 것인데, 이에 대해 <부산행>은 관람 스트레스를 훌쩍 상회하는 피서 기능성을 보여준다는 1차 감별소견을 내놓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압박감 높은 밀폐형 좀비영화

<부산행>은 기본적으로 좀비영화 중에서도 압박감 높은 밀폐형 좀비영화다. 고속철 내부라는 공간 설정뿐 아니라 시간 설정에서도 열차 운행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영화의 러닝타임은 2분 빠지는 2시간. 현재 서울~부산 케이티엑스의 소요시간은 2시간18분). 이것이 여러 유사점 때문에 흔히 이 영화와 함께 거론되고 있는 <월드워 Z>와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일 것인데, <부산행>은 이 공간적 제약에 대한 나름의 복안을 세워두고 있다. 정차역이 바로 그것이다.

<폭주기관차>나 <설국열차> 등 유명 열차질주 무비에서 대개 ‘내릴 수 없음’을 절대조건으로 설정하고 있는 데 반해 <부산행>은 탑승자들에게 두 차례의 도중하차를 허하고 있다. 이는 관람자의 갑갑함을 저감시켜줌과 동시에, 좀비들이 사방에서 개미떼처럼 몰려들고 바퀴벌레처럼 매달리고 송충이처럼 하늘에서 후둑후둑 떨어져 대는 전국구적 규모의 공포를 구체적인 비주얼로 보여줄 무대를 제공한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영화는 다시 열차로 돌아가, 갑작스런 공간 확장에 따른 긴장감 저하를 차단함과 동시에 영화의 규모 및 예산을 일정 선 이하로 유지하는 이중의 효과를 득하고 있다.

이렇게 기차라는 설정을 이용해 고립공간(객차 내부)과 개방공간(정차역)을 적절하게 배합해낸 것은 <부산행>의 가장 영리한 대목이었다 할 것이다. 영화는 두 개의 정차역을 기준으로 ① 전반 - 재난영화 ② 중반 - 순수 서스펜스 액션 ③ 후반부 - 가족영화라는 세 구간으로 나뉘는데(타란티노였다면 분명 챕터 제목을 붙였을 법한 이 대목을, <부산행>은 휑뎅그렁한 역을 조망하는 묵직한 설정쇼트로 처리하고 있다) ①에서 영화는 다양한 인물들의 면면과 좀비 창궐 과정을 장황함이나 서두름 없는 적절한 리듬으로 쌓아가며 <월드워 Z>를 방불케 하는 초기흡인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②에 진입할 무렵쯤 슬슬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일단 <부산행>이 제시한 좀비는 딱히 새로울 것이 없다.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부산행>의 좀비는 <월드워 Z> 좀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뭐, 그건 좋다. 딱히 이 영화가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재해석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관건은 영화가 좀비라는 메스로 이 사회와 우리 자신의 내면 어디까지를 해부-해체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므로.

이 대목에서 <부산행>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것이 2차 감별소견이다. 물론 ①에서 영화는 작정한 듯 한국 사회의 각종 지리멸렬한 면모들을 건드리고 있다.(좀비 창궐은 ‘소요사태’로 왜곡 보도되고,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들은 좀비 되어 국민들을 공격하고, 일부 어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이들을 소모품으로 희생시킨다 등등.) 그 장면들이 우리 역사, 그리고 현재의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굳이 애기할 필요조차 없다.

그 중심에 주인공 ‘석우’(공유)가 있다. 그는 “너 개미 입장까지 생각하면서 일하냐?”는 말을 내뱉는 펀드매니저다. ‘상화’(마동석)의 정의에 따르면 그는 “남들 피 빨아먹고 사는 놈”이다. <부산행>은 그런 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말 그대로 좀비처럼 몰아가고 있는 ‘이기주의’(생존이라는 절대명제로 정당화되곤 하는)라는 괴물을 겨냥하는 듯 보인다.

상당히 잘 짜인 ② 순수 돌파액션의 터널을 거쳐 주인공들은 ③ 대기업 임원 ‘용석’(김의성)이 장악하고 있는 ‘안전객차’에 도착한다. <에일리언 2>의 악의 축 ‘버크’ 같은 캐릭터가 갔던 길을 거의 고스란히 되밟고 있는 악의 축 ‘용석’의 리드 아래 그곳은 좀비들 노니는 ‘위험지대’ 못지않은 이기주의의 지옥이 되어 있다. 그렇게 ‘석우’는 더 순수한 이기주의자 ‘용석’과 충돌, 이기주의의 자기파멸이라는 테마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였다만, 영화는 돌연 이들에게 ‘다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 짓’이라는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그리고 좀비라는 날 선 메스를 슬쩍 내려놓으며, 대신 천만 영화를 지향하는 한국 영화들이 최근 거의 예외 없이 장착했던 가족애라는 부스터를 점화, ③구간을 달릴 새 추진력을 얻는다.

바로 이 대목이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결정적인 분수령일 것이다. ③구간의 끝,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라도 찡함을 느낄 그 아낌없이 주는 나무적 장면을 보며 울컥하던 필자는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다. 그렇다면 ①에서 건드렸던 각종 지리멸렬들은 다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사회비판의 향취(이 또한 최근 한국 영화 흥행에 없어선 안 될 핵심부품 중 하나다)를 풍겨주기 위한 떡밥이었단 말인가? 또는 ‘다양한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갈 입소문 마케팅을 위한 밑재료였단 말인가?

(*주의! 결정적인 스포일러 구간*) <부산행>의 최종 생존자는 결국 최후의 관문 앞에 도착하고, 밤샘 사투 끝에 살아남은 흑인 주인공이 백인 자경단에 의해 사살되는 (그를 통해 걸작으로서 완성되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는 달리, 다소 어이없는 설정으로(보통 그런 곳을 지키는 군인이라면 ‘신분을 밝히라’는 방송이나 고함이라도 치지 않겠는가?) 살아남아 ‘해피엔딩’에 진입하는 데 마침내 성공한다. (*스포일러 구역 해제*) 그렇게 <부산행>은 천만 영화 향한 불씨를 끝까지 꺼트리지 않음과 동시에, 결국 출발점인 ‘생존’이라는 절대명제로 원점회귀한다.

변칙 사전개봉 논란 불러와

그런데 그 ‘생존지상주의’야말로 이 영화의 모든 재앙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것은 이 영화가 기초 상도의 교란을 불사하며 진행한 변칙 사전개봉(이른바 ‘주말 유료시사’)을 통해서 현실세계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바로 이런 식으로 한국의 영화 개봉 요일은 현재 금요일도, 목요일도 아닌, 수요일까지 당겨져 있다.)

그런데 잠깐. 이게 다 뭔 얘긴가. 이 여름시즌 대박 겨냥 영화 한 편에 우린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닌가. 새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부산행>은 매우 영리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상업영화의 가장 큰 과제는 흥행이고, 영화의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그 목표지점을 향하고 있다. 잘 만든 상업영화에서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나 통렬한 전복적 성찰을 만날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아니더라도 그것이 큰 허물일 수는 없다. 사실 우리가 영화 한 편에 과하다 싶은 기대와 무게를 거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기본적 합리성과 초보적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그렇게 ‘좀비 블록버스터, 국산화 성공’이라는 성취에서 아쉽게도 멈춰서버린 <부산행>은, 어쨌거나 한국 사회에 대해 새삼 곱씹게 하고 있다. 영화 안에서건 밖에서건. 의도되었건 아니건.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53551.html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4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