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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구나” - 박용현

by 오직~ 2015. 12. 1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0883.html

 

 

 

 

 

미국 주간지 <더 네이션>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독재자의 딸이 노동자를 탄압하다’)를 실은 데 대해 뉴욕의 한국 총영사관이 항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가 겪은 똑같은 상황이 떠올랐다.

 

주간지 <한겨레21> 편집장으로 일하던 2008년, 타이 왕실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몇 대목 소개하면 이렇다. 타이는 입헌군주제라지만 왕실의 실권이 대단하다. 왕의 동생인 공주가 사망하자 보름 동안의 국장과 100일 동안의 애도 기간이 이어졌고 열 달 뒤 900만달러의 예산을 들여 또 장례식을 치른다. 왕실모독죄라는 게 있어서 영화 상영 전 왕실찬양가가 흘러나올 때 기립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왕실 비판은 3~15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 <비비시> 방콕지국장이 토론회에서 왕실을 모독했다고 고발돼 곤욕을 치렀다.

 

기사가 나간 뒤 주한 타이 대사관에서 찾아왔다. 기사의 팩트를 따지진 않았다. 그저 ‘왜 이런 기사를 쓰느냐’는 항변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타이를 잘 몰랐다가 저 기사를 통해 좀 이상한 나라라고 느끼던 차에 외교관의 항의 방문을 받고 확신에 이르렀다. ‘아, 이 나라는 독재국가구나.’ 먼 나라 주간지에 실린 왕실 비판 기사에도 이토록 파르르 떨며 대응하는 걸 보면 개인숭배와 공포정치의 정도를 알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 꼴이 된 셈이니 얼굴이 달아오른다. 뉴욕 총영사관은 ‘언성을 높여 항의했다’는 점은 부인하지만, 의미 없다. 그날의 타이 외교관도 정중했으나, 나는 속으로 ‘참 한심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더 네이션> 편집장과 기자는 한국 외교관의 이례적인 반응을 접하며 자신의 기사에 한층 확신을 가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더욱 창피한 것은 기사에 그려졌던 타이의 ‘비현실적 현실’이 지금 이 땅에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지 좀 뿌렸다고 무려 일곱 달째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박성수씨의 고난은 왕실모독죄를 무색하게 한다.(대통령을 골룸에 비유한 의사가 대통령모욕죄로 기소된 터키도 세계적인 웃음거리인데, 대통령 쪽이 직접 고소했음에도 불구속 재판이란다. 반면 박 대통령의 고소도 없었는데 경찰·검찰·법원이 ‘알아서 잡아 가두는’ 한국 상황은 웃음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다.) 그뿐인가.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공방 창문에 박 대통령을 ‘독재자의 딸’로 표현한 포스터를 붙인 황아무개씨는 경찰과 형사 10여명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경찰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한 건 웃어넘긴다 해도, 내 창문에 포스터 하나 붙였다고 경찰이 우르르 몰려드는 현실은 또 얼마나 공포스러운가.(미국 연방대법원의 표현을 빌리면 “주거지 마당이나 창문에 의견을 내거는 것은 특별하고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서 존중돼야 한다. 신문 광고를 내거나 거리로 나설 만한 재력도 시간도 없는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값싸고 편리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7시간 의혹’을 제기한 <산케이신문> 기자가 기소된 것까지 더하면 타이와 한국 상황은 ‘싱크로율 100%’에 가까워진다.

 

왕조국가를 흉내 내는 건가. 아니, 흉내라도 제대로 내면 좋겠다. 옛날 임금은 채시관으로 하여금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수집하도록 해 민심을 읽었으니 <시경>이 그런 기록이다. 혹정을 원망하는 노래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구나”(‘여분’)라고 지탄하는 목소리도 담겼다. 3000년 전에도 그랬는데, 21세기 공화제 국가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민의 입이 틀어막히고 있다. 불타는 듯 어지러운 혹정, 그 이상으로 해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