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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부르는 ‘님’이 박헌영 선생” - 원경스님

by 오직~ 2015. 12. 16.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721163.html

 

 

 

 

 

“국민가요로 널리 불리던 김정구(1916~98)의 ‘눈물 젖은 두만강’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의 ‘님’은 박헌영이다.” 1927년 제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금당한 박헌영이 정신병자 행세를 해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이듬해 임신한 아내 주세죽과 함께 삼엄한 감시체제를 뚫고 두만강 하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탈출한 사건의 현장 감독은 영화배우이자 연출가 김용환이었고, 김정구는 그의 친동생이었다. 그때 기획사 예원 소속 무명가수였던 김정구는 박헌영 탈출사건의 기획자인 민족주의자 박승직(두산그룹 창업주)의 도움으로 오케이레코드로 옮겨 35년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녹음했다. 가사는 김용환이 ‘박헌영 탈출 성공’을 박승직에게 알리기 위해, 사전 약속에 따라 신문에 기고한 시 ‘눈물진 두만강’을 개작한 것이다. ‘님’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장사로 번 돈을 아낌없이 항일조직에 희사했던 박승직과 박헌영 사이를 연결하던 암호였다.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 남쪽 혈육
8살때 헤어진 부친 ‘선생님’ 호칭
지리산 이현상부대 거쳐 승려로

2004년 ‘자료전집’ 바탕 만화로
출생서 식민지 해방까지 삶 담아
“이념의 벽 갇힌 이유 알 수 있어”

 

월북 시인 백석과의 연애담으로 유명한 ‘자야’(김영한)가 살았던 경성 최대 요정 대원각(지금의 길상사)의 원주인은 박헌영의 이복누나요 후원자 조봉희였다. “자야는, 조봉희의 딸로 이화여전을 나와 박헌영의 권유로 구미유학을 다녀왔고 역시 박과 남로당의 후원자였던 김소산(김정진)이 데리고 있던 ‘새끼 기생’이었다.”

 

이런 ‘뜻밖의 뒷얘기’들은 조선공산당 및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1900~56)의 삶을 재조명한 6권짜리 <만화 박헌영>(이정기념사업회 기획, 유병윤 그림, 김용석·유병윤 글, 플러스예감 펴냄)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이념 편향의 냉혈적 공산주의자로만 알려진 그를, ‘만화 박헌영’은 투철한 항일독립운동가요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헌신하다 남북 모두로부터 외면당한 채 스러져간 비운의 혁명가로 재구성한다.

 

“전집은 전문가·학자들에게나 소용있는 것이어서, 선생님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좀 더 널리 알리자는 뜻에서 시작했다. 1, 2년이면 될 줄 알았는데, 10년이나 걸렸다.”

 

박헌영의 직계 혈육으로 남쪽에선 유일한 생존자인 평택 만기사 주지 원경 스님은 출간 소감을 묻자, “아이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답답한 것이, 사실은 지금부터 제대로 그려야 하는데 시절이 이러니…”라며 말을 흐렸다. ‘평생 모아온 자료를 토대로 아버지께 보내는 진혼곡’이라는 부제를 단 만화집은 박헌영의 출생부터 식민지 해방까지의 삶을 담았다. 해방정국과 월북 그리고 북에서의 ‘숙청’에 이르는 그 이후의 삶을 담는 작업은 당장은 손대기 어렵다는 얘기다.

 

‘전집’이란 2004년 역사문제연구소가 펴낸 9권짜리 <박헌영 자료전집>이다. 전집 덕에 ‘만화 박헌영’은 탄탄한 구성에 믿을 만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전집 만드는 데 11년, 만화 제작에 10년. 이 오랜 세월에 걸친 작업들을 스님을 빼놓고 얘기할 순 없을 것 같다. 세속 나이 75살(법랍 55, 동자승 10년 포함 65년)인 그가 모은 자료, 전폭적인 재정 기여 없이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원고료와 자료 구입비, 번역료 등을 그가 댔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돌이, 그 역사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중에 선생님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과 북에서 버림받았다. 그의 생애를 통해 우리 현대사가 어떻게 일그러지게 되었는지, 왜 우리의 삶이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경 스님은 친부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가 8살 때인 48년 북으로 간 뒤 다시는 보지 못한 박헌영을 아버지이기 전에 역사적 인물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남로당 지도부 이주하·김삼룡이 체포되고 남로당 아지트가 박살나는 현장을 지켜본 그는 10살 때인 50년 한국전쟁 직전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요 조직원이었던 김제술(한산 스님) 손에 이끌려 지리산 이현상 부대에 들어갔다가 생환한 뒤 지금까지 불교계에 몸담고 있다.

 

“내가 지금의 서울 예지동과 장충동 어름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김삼룡이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다녔고, 심부름도 시켰다. 어느 날 경찰들이 아지트로 들이닥쳤는데 수갑을 찬 김삼룡이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들은 전쟁 직후 형무소에서 즉결처분당했고, 북에서 부수상까지 올랐던 박헌영은 53년 체포돼 55년 ‘미제 간첩’ 판결을 받은 뒤 이듬해 처형당했다.

 

속명이 ‘박병삼’인 스님은 박헌영과 두번째 부인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복형제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큰어머니(주세죽)와 함께 모스크바에 살던 이복누나(비비안)는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91년 내 초청으로 한국도 다녀갔다. 그때 고향에 가서 친척들도 만나봤다. 북에도 배다른 형제 둘이 있는데, 만나본 적은 없다.”

 

대원각을 물려받은 김소산은 박헌영의 주요 후원자였는데, 49년 ‘오제도 검사 암살음모 사건’에 연루돼 투옥당했다. 그때 데리고 있던 자야에게 집의 관리를 맡겼다. 이듬해 전쟁을 겪으며 대원각은 주인 없는 집이 돼버렸다. 나중에 자야가 등기이전을 해 소유주가 됐다. 83살로 별세하기 전 자야가 법정 스님 쪽에 넘겨준(송광사 명의) 대원각은, 원래 원경 스님에게 주기로 약속한 것인데, 개인 상속을 하면 나오는 엄청난 세금과 ‘빨갱이’ 집안 내력에 대한 사회적 터부 등을 고려해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스님은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조계종 종정 출마 및 추천 자격이 있는 대종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