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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정확한 사랑의 실험

by 오직~ 2015. 3. 21.

<러스트 앤 본>

감독 : 자크 오디아르 베릭에 외, 2012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감독 : 이누도 잇신, 일본 2003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느껴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음으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로렌스 애니웨이>

감독 : 자비에 돌란 캐나다 외, 2012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감독 : 압둘라디프 케시시, 프랑스 외, 2013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두 주인공이 여자라는 시실, 즉 이 영화가 레즈비언들의 서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잊게 만들면서 '보편성'의 층위로 넘어가지만, "로렌스 애니웨이"는 로렌스와 프레드의 관계가 갖는 '특수성'을 내내 잊지 않으며 이 연인들은 번번이 같은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만다. 요컨대 정확한 사랑을 그리는 정확한 영화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 두 영화가 '보편과 특수'의 층위에서는 의미있는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

 

 

<케빈에 대하여>

감독 : 린 램지, 영국 외, 2011

 

 

<아무르>

감독 : 미하엘 하네케, 프랑스 외, 2012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게다가 좋은 용모를 유지하고자하는 열망을 없애주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계속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형상들을 빚어낸로써 우리의 고통을 한층 격화시킨다."

(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문학동네)

 

노베르트 엘리야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1982)

 

 

<악마를 보았다>

감독 : 김지운, 2010

<올드보이>

<피에타>

 

 

<뫼비우스>

감독 : 김기덕 2013

 

인간의 조건(즉, 욕망)을 탐구한 결과인 그것들[김기덕과 홍상수의 영화], 잊을 만하면 우리가 인간임을 다시 상기하게 만드는 선물. 조물주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을 만들어 넣은 것은 인간이 계속 살아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는 인간의 삶이 그 욕망과 더불어 장차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미리 계산하지 못했거나 안 한 것 같다. 그 계산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맬랑콜리아>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덴마크 외, 2011

 

 

<테이크 셸터>

감독 : 제프 니컬스, 미국, 2011

 

 

<더 헌트>

감독 : 토마스 빈터베르, 덴마크, 2012

 

누구도 잘못하고 있지 않은데,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합리적 부조리'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니까 이것은 광기의 지옥이 아니라 이성의 자옥이다.

광기의 창궐로 열린 지옥의 문은 이성으로 닫을 수 있지만, 이성의 집단적 사용이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열어버린 지옥의 문은 무엇으로 닫을 수 있을 것인가.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대체로 옳다고 우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혐오스럽다.

 

[롤리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열세 살, 수아>

감독 : 김희정, 2007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감독 : 김희정, 2012

 

"사건은,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늑대소년>

감독 : 조성희, 2012

 

어떤 영화의 태도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그 영화가 (선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를 윤리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일들은 대체로 선과 악이 서로 번지고 섞이는 불투명한 경계 지점에서 발생한다. 선과 악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서사들은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선한 우리는 악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이라는 판타지 못지않게 이것 역시도 일종의 윤리적 판타지일 수 있다.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는, 선의 기반이 사실상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악의 본질이 보기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선의 악'과 '악의 선'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태도일 것이다. 적어도 이야기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이 세상의 모든 단호한 경계들에 대해서 확신보다는 회의를 품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스토커>

감독 : 박찬욱, 2013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 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내 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지. 사람들은 못 보는 작고 멀리 있는 것들이 내게는 보여. 이런 감각들은 일생동안의 열망이 낳은 것이지. 구출되고 싶은 열망, 완전해지고 싶은 열망. 스커트가 펄럭이기 위해서 바람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나는 아빠의 밸트를 맸고 엄마의 블라우스를 입었으며 삼촌이 준 구두를 신었지. 이게 나야. 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이것을 깨달을 때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지."

 

 

<그래비티>

감독 : 알폰소 쿠아론, 2013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면, 생명이 긍정되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대답에도 역시 만족하디 못한다. 어쩌면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일까.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일단은 좋은 질문이라 믿고 계속 물어나갈 수밖에 없겠지. 나는 내 생명의 절반을 살았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건 나를 다시 낳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노예 12년>

<헝거><셰임> 스티브 매퀸

 

아무것에도 중독돼 있지 않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분명히 한 가지에는 중독돼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중독돼 있는 것이니, 그는 곧 '자기-중독자'다.

 

동물적 생존과 본래적 실존을 가르는 기준은, 발목에 쇠사슬이 감겨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있을 것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스티브 매퀸의 '삶의 의미' 3부작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들에게 '자신이 노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때만 주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이 이상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영화다.

 

 

[모든 것은 빛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김동규 옮김 사월의 책

[정신현상학]

헤겔, 임석진 옮김 한길사 2005

 

<사랑니>

감독 : 정지우, 2005

 

 

 

 

 

 

영화를 평한다는 것.

영화를 평하기 위해 대여섯 번 반복해서 봐야 한다는 것.

영화 한 편에 담긴 이야기속에서 만든 이들의 의도를 찾아낸다는 것.

(그러니 영화 평론가들의 훌륭한 평을 부러워해서는 안되며, 누구나 천착해서 영화를 보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은 평을 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이렇게까지 조각내서 영화의 세세한 의도를 퍼내야 하는가' '어쩌면 만든 이들도 모르는 의도를 애써 부연하느라 덕지덕지 사족을 덧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어쩌다가, 드물게 피곤감이 느껴지다가,

영화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박학한 비평가의 세심한 관찰로 감동적인 평론을 해대는(!) 글을 대하노라면 작가의 감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2014)

- 신형철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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