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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 항쟁사, 포르투갈·네덜란드·일본의 침략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배신

by 오직~ 2015. 1. 12.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72993.html

 

 

 

 

650년 무렵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인 아체는 15세기 이슬람제국을 건설했고 안다만해와 말라카(믈라카)해협을 낀 동서 무역 중심지로 17세기 들어 지역 최대 부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체는 전략 요충에 자리잡은 지정학적 조건 탓에 예부터 끊임없이 외침을 당하며 고단한 항쟁사를 이어왔다. 말라카로 진출한 포르투갈과 34년 전쟁(1537~1571년)을 벌인 아체는 다시 인도네시아를 손에 넣은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이 1873년부터 대아체 전쟁을 선포하자 기록적인 69년 항쟁으로 맞섰다. 네덜란드가 1904년 승리를 선언했지만 아체는 1942년까지 게릴라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 아체는 1942년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상륙한 일본군에 맞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고단한 항전을 벌였다.

 

현대사에서 아체는 인도네시아와 손잡고 대네덜란드 독립투쟁을 벌이면서 1949년 독립한 인도네시아의 특별자치주로 태어났다. 그러나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1950년 약속을 깨고 아체를 수마트라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켜버리면서 비극이 싹텄다. 이에 맞선 아체가 1953년 이슬람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1955년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수천명을 살해하면서 무력통치의 시대를 열었다. 이어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무장통치와 경제착취로 짓밟자 아체의 항쟁 전통이 되살아났다. 그동안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 생산지에다 원유를 비롯한 막대한 천연자원과 비옥한 농지를 지닌 아체는 인도네시아 총인구의 2%에 지나지 않는 400만 인구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연간 예산 13%를 메워왔다. 아체는 인도네시아가 생산하는 가스와 원유의 30%를, 인도네시아 전체 수출량의 11%를 책임져왔다. 그럼에도 아체의 경제적 이문은 고스란히 자카르타로 실려 나갔고 아체에는 5% 남짓한 지방세만 떨어졌다. 그리하여 아체 인구 40%가 절대빈곤에 허덕여왔다.

 

결국 1976년 하산 티로(Hasan Muhammad di Tiro)가 자유아체운동(GAM)을 창설하면서 조직적인 독립투쟁 발판을 마련했다. 150여명 무장으로 출발한 자유아체운동은 1980년대 말까지 상징적인 게릴라 투쟁에 머물렀으나 오히려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체 전역을 군사작전지역(DOM)으로 선포했던 1989년부터 1998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말릭 마뭇 아체 망명정부 총리는 2003년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자유아체운동은 1990년대 들어 인도네시아 정부군의 압박을 먹고 자랐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동안 자유아체운동은 하산 티로가 이끄는 스웨덴의 망명정부가 정치를 맡고 아체에서는 무장투쟁으로 지원했다. 무장조직은 2002년 1월 압둘라 샤페이 사령관이 정부군한테 살해당한 뒤부터 무자키르 마납이 이끌어왔다. 그러나 망명정부와 무장조직 사이에는 해묵은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망명정부가 외교적 한계를 보인데다 무장투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지 못했던 탓이다. 무자키르는 1999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하산 티로를 존경하는 것과 망명정부를 인정하는 건 다르다”며 대놓고 비판할 정도였다. 무자키르는 2002년 12월 휴전협정 과정에서도 “하산 티로의 지도를 받지만 정치와 무장투쟁은 다르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 5월19일 도쿄 평화회담이 깨지자마자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이 아체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아체운동 박멸작전을 명령했다. 6개월 동안 짧았던 평화는 깨지고, 아체는 2004년 쓰나미를 맞기 전까지 다시 전쟁터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