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잠시 멈춰서자 - 이계삼

by 오직~ 2014. 5. 1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6102.html

 

 

 

 

세월호 사태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이런 시절이 또 있었을까 싶을 만치 온 나라가 열병을 앓고 있지만, 한달이 되어 가도록 뭔가 분명하게 잡히는 것이 없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사라는 얘기는 정신의학자 정혜신 박사도 하지만, 내가 매일 만나는 밀양 송전탑 움막농성장의 어르신들도 하신다.

 

저들은 이미 유병언 회장 일가와 선장과 몇몇을 제물로 삼고서 6·4 지방선거를 지렛대 삼아 이곳을 탈출할 계획을 수립한 듯하다. 지상파 방송들의 저녁뉴스는 속옷 차림으로 탈출하는 선장의 모습을 30분 남짓한 뉴스시간 동안 대여섯번이나 비춰준다. 기묘한 것은 야당의 존재다. 새누리당이야 환관 집단을 자처하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세월호 사태에서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의 존재감이 사실상 증발해버린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한국 정치가 재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무능과 무책임의 결사체이면서, 민중의 삶과 사회공동체로부터 ‘유체이탈’한 채 하나의 허울로서만 존재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가와 시민이 민낯으로 직접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가 존재한다. 세월호 사건은 정치가 먼저 나서서 국가의 기능을 일시 중지시키고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러내어 거대한 대화와 토론의 마당을 열어 놓아야 마땅한 사태인 것이다. “오늘로 이 나라는 망했다. 판을 새로 짜자. 시민들은 말을 하라. 우리는 그것을 재구성하여 의제로 만들어 주겠다.” 정치는 지금 이 나라의 시민들을 향하여 가던 길을 멈출 것을 권고하고, 이런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기-승-전-박’, 대통령이 모든 비난의 깔때기가 되는 흐름은 결국 우리들 스스로를 소진시킬 것이다. 대통령의 거의 소시오패스 수준에 이른 공감 능력의 결여, 권력자들의 무책임성과 무교양이 자주 이야기된다. 그들은 공감하지 않았기에 그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높은 자리로 올라와야 했던 자들이다. 구질구질한 민중의 삶으로부터 유체이탈한 ‘구별 짓기’가 그들 인생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망한 나라에서 망국의 주역을 향한 청원은 가당치 않다. 우리는 스스로의 재건을 위해, 그러니까 망한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의 목록을 분별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싸움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학습은 정치공간이 ‘허당’이 되어버릴 때, 국가와 시민이 직접 부딪칠 때 재난이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이며, 그 정치는 저들을 향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를 엮어 세우는 방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진실을 나는 배웠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4·19를 통과한 시인 김수영이 감격에 겨워 그가 사랑하게 된 ‘무수한 반동’을 호명하였듯이, 세월호를 겪은 우리가 불러내야 할 수많은 아픈 이름들, 토론해야 할 적지 않은 의제들이 있으리라. 자살한 세 모녀와 죽어간 노동자들, 조작된 간첩과 조작된 선거, 망한 나라의 재건과 붕괴해버린 사회의 재구성, 정치의 자리, ‘그대로 있으라’고 가르친 이 나라의 교육과 순종하지 않는 정신, 응급처방, 대증요법으로부터 대수술에 이를 수 없는 진단과 처방, 우리들 인생의 의미로까지 넘어가게 될 말들의 향연.

 

그러므로 세월호 앞에서 우리는 멈춰서야 한다. 학교는 교육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일주일이라도 방학을 주자. 기업도 일손을 멈추자. 시장도 잠시 멈춰서자. 둘러앉을 공간이 있다면 어디서든 우리는 토론해야 한다. ‘나라가 망했다. 사회가 붕괴했다. 나는 기댈 데가 없다. 망한 나라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