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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외침 “퀴부카!”

by 오직~ 2014. 4. 8.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631668.html

 

 

 

 

 

‘100일간의 참극’을 기리는 날, 7일 오전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아침은 차분했다. 주요 행사장 근처에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소총을 든 군인과 경찰이 지키고 서 있었지만, 1500m 고산지대인 시내 기소지에 있는 대학살 추모관 주변은 여느 아침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도시의 아침 기온은 약 17℃. 시원한 바람과 함께 저 멀리서 달려온 구름이 잠시 도시를 맴돌더니 이내 제 갈 길을 가버린다. 아스팔트 포장이 없는 황톳빛 간선도로에선 상큼한 흙냄새가 났다.

 

르완다 대학살은 1994년 4월6일 후투족 출신인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 착륙을 준비하던 중 격추되면서 촉발됐다. 이튿날부터 르완다 인구의 85%를 차지한 후투족이 소수인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박멸’에 나섰다.

 

손도끼와 정글용 칼이 ‘대량살상무기’였다. 후투족 무장세력은 투치족과 그들을 도운 일부 동족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피의 살육은 폴 카가메 현 대통령이 이끈 투치족 반군단체 ‘르완다애국전선’(RPF)이 그해 7월15일 키갈리를 장악할 때까지 이어졌다. 100일 동안, 줄잡아 80만~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분마다 6명씩 스러진 셈이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마찬가지로,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도 제국주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 이래 르완다 땅에선 유목민 출신인 소수 투치족이 주로 농업에 의존해 온 다수 후투족을 지배했다. 식민 지배자들은 코의 길이를 재 인종적 우월성을 감별했단다. 투치족은 지배계급화했고, 후투족은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분할통치’이자, 인종분리 정책이었다.

 

1962년 독립과 함께 선거를 통해 후투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후투족의 보복 폭력이 불을 뿜으면서, 이후 10여년 동안 줄잡아 2만여명의 투치족이 목숨을 잃었다. 우간다 등 이웃나라로 몸을 피한 투치족은 반군단체 ‘르완다애국전선’을 꾸리고, ‘귀환’을 위한 전쟁을 준비했다. 투치족 반군의 존재는 후투족을 단결시키는 힘이었고, 지배자들은 이를 독재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1993년 오랜 분쟁을 딛고 하비아리마나 정권과 애국전선 사이에 평화협상이 타결됐지만, 혼란은 계속됐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된 직후 후투 집권층은 기다렸다는 듯 투치족 말살에 나섰다. 이때 투치족 10명 가운데 1명꼴로 목숨을 잃었으니,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국제사회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후투-투치 평화협상 중재를 위해 1993년부터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벨기에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르완다지원단(UNAMIR)은 학살극이 한창일 때 ‘신변안전’을 이유로 되레 병력을 줄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학살극을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

 

참극을 경험하고도,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키갈리를 장악한 투치족 반군은 후투족 출신인 파스퇴르 비지뭉구를 대통령으로 내세웠지만, 정국을 주도한 것은 반군 지도자 출신으로 총리에 오른 폴 카가메였다. 애초 후투-투치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카가메는 2000년 4월 아예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투치 단독정부를 구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일 저녁, 키갈리의 아마호로(평화) 경기장으로 횃불이 들어왔다. 대학살 20주년을 맞아 지난 1월7일부터 올림픽 성화처럼 르완다 전역 30여곳을 돌아온 ‘화합의 불꽃’이다. 살육의 세월을 용케 견뎌낸 이들은 손에 촛불을 켜들었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는 되풀이된다, ‘퀴부카!’(Kwibuka·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