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중력과 은총 - 이계삼

by 오직~ 2014. 2. 18.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4017.html

 

 

 

 

<또 하나의 약속>을 보았다. 배우 박철민의 선한 얼굴이 참 좋았다. 영화 속의 그는 내가 그리워해 오던, 속세로 내던져진 아라한의 얼굴 같았다. 박철민과 유족들이 영정 시위를 하다 짓밟히는 장면에서는 밀양 송전탑 주민들과 유한숙 어르신 유족이 겪었던 끔찍한 폭력이 겹쳐졌다. 산업재해 판정을 받아내던 장면에서는 며칠 전 쌍용차 노동자들이 해고 무효 판결을 받아내던 법정의 풍경이 꼭 그러할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가장 강렬했던 대목은 영화 맨 마지막, 배우들이 퇴장하고 실재했던 황유미와 아버지 황상기의 얼굴이 한장 한장 영상으로 이어지던 대목이었다. 영화적 몰입을 찢어내고 현실이 나에게로 육박해 왔을 때, 100명에 달한다는 삼성반도체 발병 노동자들이 내 어깨에 얹혀졌다. 몰입에서 풀려난 관객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밀양 송전탑, 쌍용차, 삼성반도체 백혈병, 지뢰밭처럼 펼쳐진 현실 한가운데로 복귀해야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불 꺼진 거리를 걸으며 나는 황상기와 이건희를 생각했다. 이건희가 주식 배당금으로 올해에만 1천억원을 받는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이미 70대 중반에 들어선 그에게 1천억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돈은 황유미와 황상기들에게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민중들의 수중으로 돌아올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1천억원에 서려 있을 수많은 황유미와 황상기들의 고통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

 

일생토록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던 철학자 시몬 베유는 두통에 시달리다 발작이 일 때면 자신은 다른 사람 이마의 같은 곳을 때려서 아프게 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그럴 것이다. 인간사는 바늘 끝만큼의 오차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는, 베유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력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다. 이건희가 가한 고통은 끝내 어떤 방식으로든 이건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건희 또한 그렇게 살도록 빚어진 욕망의 쟁기를 일생토록 끌어야 하는, 가련한 한 마리 소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박철민의 대사처럼 ‘태어날 때는 뇌가 있었는데,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뇌를 소화시켜 버린 멍게’ 같은 오늘날 수많은 인간 군상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베유에 따르자면 여기서 벗어날 유일한 가능성은 중력의 법칙으로 하강하는 존재에게 은총의 빛이 깃들어 상승할 수 있을 ‘빈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여든일곱 되신 할머니 한 분이 내가 일하는 밀양 송전탑 대책위 사무실을 찾아왔다. 작년 10월 초에는 한전의 공사 현장을 지키러 들어오는 경찰을 향하여 오물을 던져 그 연세에 연행까지 당한 분이다. 마을 이장을 지낸 한 남정네가 본인의 만류에도 ‘제가 알아서 하겠심더’ 하면서 합의도장을 대리로 찍었다. 얼마 뒤 당신의 통장에 합의보상금 육백만원이 들어온 것을 알고는 며칠 동안 주무시지도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마음고생을 하다가, 대책위 사무실로 가면 반납해주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단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어르신이 내게 말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 돈 받아서 머하겄노. 나는 죽을 길만 바라본다. 이 탑 세워지고, 선산 더럽힜는데, 돈까지 받아묵으먼 조상님들을 내가 우째 볼끼고. 우리 자슥들은 돈 몇푼 받아 묵고 도장 찍어준 내를 뭐라 카겠노.’

 

황상기의 투쟁은 이건희에게 은총의 계기를 열어주었다. 저 어르신은 한전과 정부에게 중력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을 빈자리를 열어주었다. 그 한순간의 빈자리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은총도 구원도 결국은 짧은 순간이다. 그딴 것 관심 없고, 끝까지 해드시기만 하겠다면 할 말은 없으나,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0140213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