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도 격도 없었다
필자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장고나 밀폐된 장소에 보존만 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 문화의 특징과 동북아 문화의 다양성을 향유하기 바랄 뿐이다. 다만 문화유산의 활용과 향유에는 만인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하는 보편적 향유권(문화권)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데, 신분과 경제력에 의해 향유권이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문화유산을 공개하고 향유할 경우에는 원칙과 격(예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3월26일 외국 정상 배우자들을 위한 만찬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했다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도 없고 국격을 바닥으로 내리친 일로, 한국인으로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낀다.
첫째, 소중한 문화재가 만찬을 할 식당을 꾸미는 데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수장고에 있었던 국보급 도자기와 그림, 목가구 들을 소위 특수한 신분을 가진 ‘그들만의 저녁 만찬’의 분위기를 띄우는 용도로 만들어 놓고, 유리전시관 안에 두어서 안전하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마치 19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사르키 바트만’에 대한 가진 자들의 만행이나 다름없다. 사르키 바트만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납치된 원주민 여성으로, 런던 한복판에서 반라의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아프리카 희귀종으로 전시되었다. 숨진 뒤에는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서 그녀의 뇌와 생식기를 표본 처리해 영구 보관하고, 전신은 밀랍모형으로 만들어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사르키 바트만이 19세기에 이어 2012년 3월26일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다른 공간도 있는데 굳이
기획전시실 개조까지…
외국 박물관 만찬행사는
운영기금 마련 위한 것
둘째, 국립박물관에는 으뜸홀이나 기획전시실 입구에 넓은 전실이 있다. 얼마든지 사용할 공간이 있는데도, 식후 공연을 위해 천장이 낮은 곳을 골랐고, 소품으로 전락한 유물이 식탁에서 바로 보이게 하려고 무리하게 기획전시실을 개조까지 했다는 것은 의도적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반 관람객에게는 음료수도 못 먹게 하면서 만인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할 문화 향유권을 거부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박물관 체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셋째, 국립중앙박물관 쪽의 궁색한 변명이다. 설사 상급 기관에서 시켜서라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라고 용기 있게 응대한 학예사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인가?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의 보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가이다. 또 외국의 박물관 몇 곳을 거론하며 그들은 만찬을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하고 궤변을 하는데, 외국의 경우 전시실을 식당으로 개조하거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유물을 전시하지는 않는다. 특히 만찬을 하는 외국 박물관은 박물관 운영이 어려워 운영기금을 마련하는 행사이며 반드시 이런 만찬이 옳다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운영경비는 전액 국민의 세금으로 대고 있다. 외국 박물관에서 배울 것은 안 배우고 못된 짓만 배우는 귀족 중심의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쪽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넷째, 참여정부 시절 경복궁·창경궁에서 거행되었던 행사도 대부분 비판 대상이었다. 경회루 세계검사대회 술판, 창경궁의 세계철강협회·신문협회 만찬도 술판과 무질서로 호되게 비판받았다. 궁을 활용하고 개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이번 박물관 전시실 내 만찬은 실내 전시관이라는 데 더 문제가 큰 것이며 예의와 격도 없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 연구소장
20120330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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