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나는 인간이므로, 나는 살아 있으므로,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므로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 죽음 안에도 삶은 있다. 적들이 성을 둘러싸도 뚫고 들어갈 구멍은 있을 것이다. 가자, 남한산성으로 가자. 김상헌의 몸속에서 울음은 그렇게 울려 나왔다.
버티지 못하면 어찌 하겠느냐. 버티면 버티어지는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아니냐... 김상헌은 말을 아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가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또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성 안에서 세상은 끝날 것이고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다 바쳐야 할 것이지만, 아침은 오고 봄은 기어이 오는 것이어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왔듯 성 안에서 성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없다 하겠느냐...
성벽은 산의 높낮이를 따라 출렁거렸고, 성을 쌓은 자의 뜻에 따라 굽이쳤다.
너희 군신이 그 춥고 궁벽한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
달이 능선 위로 올라 내행전 마루를 비추었다. 쌓인 눈이 달빛을 빨아들여서 먼 성벽이 부풀었다. 달빛는 눈 속으로 깊이 스몄고 성벽은 땅 위의 달무리처럼 보였다. 추위가 맑아서 밤하늘이 새파랬다. 동장대 쪽 성벽이 별에 닿아 있었다.
해가 떠올라 들을 깨우는 힘과 강이 얼고 또 녹아서 흘러가는 힘으로 성문을 열고 나올 수는 없을 터이지만 삶의 길은 해 뜨고 물 흐르는 성 밖에, 강 너머에, 적들이 차지한 땅 위에 있을 것이었다.
죽음을 통과해서 삶의 자리로 나아가려는 뜻이 없고 물러섰다가 몰아치려는 계책도 없이 목전의 화급을 피하여 한 줌의 군마를 모아 외지고 오목한 산속으로 들어와 갇혀서 통할 길이 없고, 적의 화력은 한 점 성으로 집중되는데 성 안의 화력은 팔방으로 흩어지니 성벽이 밖을 막기보다 안을 먼저 막아서 열고 나아갈 수가 없고, 열고 나아가도 밖의 길들과 닿지 않으니, 곤지(困地)가 말라서 사지가 되는 것이라고 민촌 사랑에 모인 늙은 유생들은 말했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 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릴 것이므로, 군사를 앞세워 치고 나가는 출성과 마음을 앞세워 나가는 출성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먼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김상헌은 생각했다.
일천육백 년 전 계묘(癸卯)년에 적의에 찬 세상의 침학(侵虐)과 박해에 쫓기는 젊은 온조가 한 줌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 하남의 산성 자리에 당도하여 마을을 길러 나라를 열었는데, 사나운 외적에 둘러싸인 온조의 나라는 늘 위태로웠으나 젊은 임금은 군사를 몰아 강가에 나가서 적을 맞아 싸웠고, 백성들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목책을 쌓았으며, 임금과 백성이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 가며 달아나고 또 무찔러서 온조의 나라는 위난 속에서 오히려 강성하였으며, 기근과 살육의 땅 위에 봄마다 배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기러기들이 왕궁 숲에 깃들여 돌아가지 않았다...
망월봉 꼭대기에서 칸은 원단의 찬술을 마셨다. 조선의 산성과 행궁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오목한 분지 안에 마을이 엎드려 있었다. 흰 성벽은 단정하고 날카로웠다. 흙이 맑았다. 성은 유년의 설화처럼 보였다... 조선은 저러한 나라였구나. 성이 이야기 속 같을수록 성문이 스스로 열리기는 쉽지 않겠구나... 칸은 생각했다.
조선의 봄은 어린 계집과도 같구나.
홍이포의 사정거리 안에서 명을 향해 영신의 춤을 추던 조선 왕의 모습은 칸의 마음에 깊이 박혀들었다... 난해한 나라로구나... 아주 으깨지는 말자... 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부서져야 새로워질 수 있겠구나...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끓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캍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 남한산성
- 김훈 / 학고재 -
봄햇살은 따사롭고 산성 줄기마다 등산객들로 붐비는 그 곳이, 그 곳이었다는 실감은 없었다.
치욕으로 일그러진 역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길게 능선따라 굽이치는 산성 위로 봄기운이 나른하기만 했다.
책 읽는 내내 답답했던 '울화'는
남한산성의 바람을 맞으며 씻기워지고
조금도 변함이 없는 '정치'는 시끄럽게 오늘도 살아있구나 라는 실감으로
다시 조금 우울해졌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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