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가지 통찰을 說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요, 그것은 통찰이다.
흔히 '금강경'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羅什의 역본, "金剛般若波羅蜜經"을 梁나라의 昭明太子가 三十二分으로 分節하여, 각 분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羅什의 금강경의 가장 正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인 것이다.
나의 금강경강해는 "고려대장경" 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
우리의 금강경은 1238(戊戌)에 彫造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오는 "금강경언해"는 바로 世祖가 직접 한글로 吐를 단 것.
금강경이야말로 "無我"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Sin = 業 = 행위(Deed)
乾坤一戱場 건곤은 하나의 연극무대
人生一悲劇 인생은 하나의 비극일 뿐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장한 듯이 무대위서 떠들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운 소리와 광포로 가득하지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배타(排他)는 배자(排自)이다.
배타를 通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결국은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래할 뿐...
윤회는 인도문명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의 기본틀이다. 윤회없는 삶이란 없다.
윤회란 한마디로 내 삶의 행위가 행위 자체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業이 되어 時間속에서 영속된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나의 삶이 삶이 아니다. 이 生死의 끊임없는 고리를 이어가는 業은 나의 삶의 도덕적인 행위다.
善業은 善果를 낳고, 惡業은 惡果를 낳는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윤회는 하나의 사실이다. 시간속의 존재의 사실이다. 윤회속에는 인간의 구원의 여지가 없다. 윤회의 영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業의 存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 할 正宗法印인 "諸法無我"라는 것이다.
法은 存在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
我라는 것은 實體(substance), 실체란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
= 나를 나이게끔 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나의 자기동일체로서 나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체의 구성요소를 色,受,想,行,識의 五蘊이라 부르고 그 조합을 假合이라고 부른다.
나는 存在가 아닌 五蘊의 假合인 것이다.
我가 없는데 윤회가 과연 가능할까? .... 윤회와 無我의 모순!
我相이란 나라는 생각
人相이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
衆生相이란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 저 죽어있는 돌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감
壽者相이란 시간의 존속을 가지는 모든 존재
妙行無住 아름다운 행동(보시)은 집착이 없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虛妄 : 존재 자체의 虛妄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 수단이 모두 虛妄하다는 뜻)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
應无所住而生其心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우리가 "참는다" "인내한다"라는 말을 할 때, 흔히 우리는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박해의 실체를 상정하기 쉽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참음"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욕됨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받는다는 적극적인 뜻과, 모든 일에 대하여 희로애락의 동요됨이 없이 사물의 본성이 平等無二함을 깨달아 해탈한다는 의미로 확산된다.
사실 "인욕"의 본질은 참는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박해의 실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참는 대상이 없어지고 참는 주체가 사라지는 경지가 곧 "인욕바라밀"
究竟無我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如來者 卽諸法如義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無實无虛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바로 그 속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나니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
無法可得 얻을 법이 없어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
無斷無滅 끊음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不受不貪 받을 생각도 말고 탐하지도 말라
如來者 無所從來 亦无所去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一合離相 모이나 흩어지나 한 모습
나의 존재는 하나의 폭력이다! 나의 생명은 神의 폭력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런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가? 몸을 하루만 안 가꾸어도 내 몸은 잡초처럼 온갖 꼬무래기들이 돋아나고 병이 걸리고 하지를 않는가? 나의 몸의 평형 체계는 분명 잔디밭의 유지와 같은 폭력적 사태임이 분명한 것이다.
거시적인 假合상태는 실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假合상태를 구성하는 구성 최소단위 그 자체는 實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과학적인 원자론의 세계관은 대강 이러한 생각위에 서있다. 이 구성 최소단위를 소승불교에서는 바로 法 즉 다르마라고 불렀다. 이러한 소승부파불교의 입장을 우리는 "我空法有"라고 부른다, "나라는 실체는 없지만 나를 구성하는 법은 實有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이러한 有論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我空法有"라고 한다면 결국 "無我論"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無我論의 궁극은 法有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세계는 空인가? 대답은 각자가 찾아보라!
存在는 無다! 과연 이 無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離는 至小無內의 세계
合은 至大無外의 세계
知見不生 앎을 갖지 말지어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眞言
나모바가바떼 쁘라갸 빠라미따예
옴 이리띠 이실리 슈로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 금강경강해
- 김용옥 -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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