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네 극장에서 ‘중국’ 무협영화를 꽤 많이 보았다. 장문인, 사파, 비기, 흑마술 같은 말들이 흘러넘쳤다. 영화의 막바지는 대체로 울창한 숲에서 싸우던 주인공과 원수가 한바퀴 굴러서 광대한 평원으로, 또 거기서 한바퀴 굴러 바닷가 모래밭에서 으르렁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극장 문을 나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깨가 움찔움찔했고 까짓, 벽돌 한 장도 여지없이 깨트릴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실제로 공사판에서 벽돌을 가져와서 기합 한 번 지르고 내려쳤다. 한동안 연필을 쥘 수 없었다.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 하던 시절, 무협영화가 끝나면 동네 조무래기들이 극장 무대로 뛰어올라가 소리 지르고 발차기를 하고, 그러면 쇼 진행자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아이들을 무대 아래로 쫓아낸 후,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하던 시절을 생각하니,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무협의 대장관이나 갱들의 복수혈전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게 되었는데, 아뿔싸, 철이 들고 만 것이다.
철이 들면 다들 그럴 것이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것을 ‘괄호 열기와 괄호 닫기’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의 몸을 그저 수술의 대상, 그 객체로 여긴다. 수술 과정에서 피가 흘러도 그것은 평소 떠올리는 ‘피!’, 바로 그것은 아니다. 괄호 안에 일상의 관념이나 이미지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온전히 수술에 몰입할 수 있다. 다만 수술이 끝나면, 의사는 다시 괄호를 벗겨내고 환자의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상태를 염려하고 더 나은 치료 방법이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과 미학>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미적 태도는 다른 요소를 괄호에 넣음으로써 성립한다. 그러나 그 괄호는 언제라도 벗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영화관에서 갱을 영웅으로 봐도 좋지만, 바깥으로 나가면 곧바로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라타니 고진의 ‘괄호론’은 지금 우리 사회의 문화 ‘경색지국’을 검토하는 데 요긴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효리의 뮤직비디오 ‘치티치티 뱅뱅’이다. 나는 이 뮤직비디오에 매우 실망했다. 그 화면들은 꽤 많은 뮤직비디오의 익숙한 문법을 모사했다. 불시착한 유에프오(UFO)란 식상한 설정이었다. 이효리 정도 되면 거칠 것 없이 실험을 해볼 만한데, 매우 진부한 설정이라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한국방송>(KBS)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뮤직비디오의 몇몇 장면이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결국 해당 장면은 삭제됐다. 한국방송은 도로교통법을 괄호 안에 넣을 줄 몰랐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문화계가 ‘소송 천국’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회피 연아’ 동영상과 관련하여 ‘교육 차원’에서 소송을 걸었다가 ‘건전한 인터넷 문화’ 운운하면서 취하를 검토했다. 노원구청은 동물 학대 논란을 빚은 ‘호랑이 전시’에 항의한 시민 7명을 고소했다. 인터넷의 작동원리나 공직자에 대한 풍자의 문법을 일단 괄호 안에 넣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풍자의 진의다. 그런데 모조리 괄호 바깥으로 꺼내놓고 겁을 준다. 두 기관 모두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하겠다’고 했는데, ‘용서’란 사법이 아니라 윤리의 언어다.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은,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는 말이다. ‘용서’란 공직자가 써서는 안 될 용어다.
이런 일들이 비산먼지가 되어 뿌옇게 날아다니다가 어떤 계기로 갑자기 뭉쳐지면 강고한 힘으로 전화되어 일종의 ‘파시즘 문화 정책’으로 변질될 수 있다. 최근 인천의 어느 여고에서는 ‘예절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갑자기 시계가 거꾸로 흐른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예의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지만, 과거의 기억이 말해주듯이, ‘예절 교육’이란 강요된 이데올로기다. 연병장을 모사한 운동장, 그 이름도 선연한 구령대, 직사각형의 건물들. 바로 학교 현장의 구조다. 이 낡은 구조 안에서 ‘예절 교육’을 한다는 것은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해주겠다’는 기관들의 작동 원리와 흡사하다.
히틀러 시대 때, 문화 책략가 괴벨스는 순결과 순혈과 순수를 주창하면서 이에 위반하는 모든 사상, 음악, 그림을 ‘퇴폐적이고 불온한 것’이라고 탄압했다. 괴벨스의 행동대원은 인간의 유형과 성적 취향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입증한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의 연구실을 습격하였는데, 그때 그들은 모두 ‘흰 색’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순혈, 순결, 순수 운운하면서 ‘예절, 인성, 건전’ 따위를 운운하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의심해야 한다. 괄호를 열거나 닫을 줄 모르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아, 손으로 벽돌을 후려치면 그것이 깨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말이다. 손도 아프지만, 어쩌다 벽돌이 부서지기도 한다. 위험하다.
20100501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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