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처음 악을 만드신 신의 섭리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의 힘으로 지상낙원을 구현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던 그동안의 노력이 대부분 무모한 자기희생처럼 보이는 것은 의인(義人)의 힘이 미약해서가 아니라 악인의 열정이 너무나 열렬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략이나 아프간 전쟁을 막아내기에도, 팔레스타인 난민이나 수단의 난민들을 구해내기에도 우리의 힘은 턱없이 부족하다. 작게는 용산참사의 책임자를 처벌하거나 4대강 개발사업을 막아내지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작게는 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하거나 대학교의 등록금을 낮추는 투쟁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전쟁과 개발은 계속해서 기층 민중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이며, 자연은 더욱 무참히 파괴되고,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구조조정은 가속화될 것이며, 항시적인 실업에의 공포로 우리의 삶은 불안해질 것이다. 기회의 평등만 제공될 뿐 결과로서의 평등은 요원할 것이며, 오직 능력이 뛰어난 몇몇 개인들만 자유와 평등의 과실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싸움에서의 실패는 자명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더욱 야만스러운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적어도 좀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더 많은 거룩한 바보들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영국시인인 위스턴 휴 오든은 1939년에 죽은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기리며 아름다운 비가(悲歌)를 썼는데, 이 비가에서 그는 식민지 아일랜드의 가슴 아픈 현실로부터 예이츠의 주옥같은 시들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아일랜드의 광기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개혁이나 혁명과 달리 현실 자체를 바꿀 힘이 시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광기가 시작되기 직전, 시인 오든은 언어로 일구는 희망을 노래했다. 시대의 공포 속에서도 언어의 힘을 믿었던 시인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이 희망의 포도밭을 일구는 한, 매번 싸움에서 지고 절망의 심연을 헤매더라도 다시 일어나 춤출 수 있으리라
지금도 아일랜드의 광기와 날씨는 여전하다./ 시(詩)란 무슨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게 아닌 까닭에./ 시는 지배자가 결코 간섭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시인이 만드는 말의 골짜기에서 살아남아,/ 고립의 목장과 잦은 슬픔과 우리가 믿고 거기서 죽는/ 생경한 도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간다./ 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방식, 하나의 입으로 살아남는다.
예이츠의 시는 정치가 아니기에 아일랜드에 지상낙원을 건설하지도, 임박했던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배자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강물처럼 흐르는 시는 사람의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온다.
따르라, 시인이여, 바로 따라오라/ 밤의 심연 끝까지, 거침없는 그대의 목소리로써/ 우리도 기뻐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설득하라./ 시를 일굼으로써 저주를 포도밭으로 만들고,/ 고뇌의 환희 속에서 인간의 실패를 노래하라./ 마음의 사막 한 가운데 치유의 분수를 샘솟게 하고,/ 그대가 보낸 세월의 감옥 속에서 자유인에게 찬미하는 법을 가르쳐라.(W. H. 오든, <W.B.예이츠를 추모하며>
오든에 의하면 시인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존재이다. 또한 시인은 저주로 가득한 사람의 마음속에 시의 포도밭을 일굴 수 있는 존재이다. 비록 인간의 여러 기획들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 황량한 마음을 치유할 샘물을 다시금 퍼올리고, 그 자신이 고립의 감옥에 갇힌 세월을 통해 자유인들에게 삶을 찬미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존재이다. 바로 이것이 예이츠가 시를 통해 한 일이었다. 생명의 본질이 기쁨과 감탄과 찬미임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이런 거룩한 바보 같은 존재들이 없다면 인류는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꿀 수 없을 것이다.
히틀러가 등장하고, 나치 독일의 무시무시한 광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그 불안하고 어둡던 1939년에도 오든은 사람의 말로 일구는 희망의 포도밭을 노래했다. 다시 오든의 목소리를 전해들은 미국 시인 토머스 맥그래스는 매카시즘의 공포가 미국 전역을 뒤덮던 1950년대의 광기 속에서도 예이츠를 추모했던 오든의 행적을 쫓아 시의 마술적인 힘에 대해 이런 답가를 보냈다.
설령 그 모든 싸움이, 설령 그 모든 점괘가/ 우리의 패배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설령 그 패배 자체가/ 우리 눈앞에 세상의 모든 암흑을 불러올 정도라 하더라도/ 시는 참된 마법과 저항의 주문(呪文)과 생의 의지를 보내준다./ 사실로 뒤덮인 돌무지 황야에서도 춤출 수 있도록,/ 그래서 테러와 추방과 절망에 맞서/ 인간다움의 예식을 행할 수 있도록.(토머스 맥그래스, <가짜 마법사에 맞서> 일부)
시대의 광기와 공포 속에서도 언어의 힘을 노래했던 시인들을 생각하면, 또 우리 눈앞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거룩한 바보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시대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문학이 참된 마법의 힘으로 희망의 포도밭을 일구는 한, 설령 매번 싸움에서 지더라도, 설령 매번 절망의 심연을 헤매더라도 우리는 또다시 일어나 기쁘게 춤을 추며 인간다움의 예식을 행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20100501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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