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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없는 세상’ / 이계삼

by 오직~ 2010. 4. 11.

 

침몰한 천안함이 평택에 있는 해군 2함대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찾았다. 서너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해 오던 졸업생 아이가 거기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전화받기를 기다리는 그 몇십초 동안 녀석과 연관된 몇 가지 기억이 온갖 방정맞은 상상들과 뒤섞여 스쳐갔다. 두번째 전화까지 끊으려는 순간, 녀석이 기적처럼 전화를 받았다. 긴장이 덜커덕 내려앉으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천안함은 2년 전 부사관 임용되고 처음 탔던 배라고, 실종자 중에 두 사람은 잘 아는 분이라고 녀석은 침울해했다.

 

아이들이 군대 가게 되었다면서 입영 전야에 전화를 걸어올 때, 밀양역에서 휴가 복귀하려고 기차를 기다리며 서성대는 아이들을 만날 때 나는 언제나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군대 없는 세상을 생각했다.

 

군복무 시절, 나는 육본 헌병 상황실에서 전군의 사고 사례를 취합하여 보고서를 만들고 전파하는 속보병 노릇을 했다. 주야 맞교대 하루 12시간 근무였다. 위장병, 목디스크, 불면증으로 제대하고도 몇 달간 고생을 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군대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의 참상이 기록된 자료를 날마다 빠짐없이 읽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순간이 있다. 선임병들의 폭행과 가혹한 이등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한 한 병사의 사건 보고서에 덧붙은 어머니의 편지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다. 엉성한 맞춤법에 만리장성으로 이어지는 어머니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아가야, 잘 자라, 엄마는 식당일이 너무 힘들어서 편지를 쓰는 지금도 눈꺼풀이 처지네, 꿈속에서 만나자…”라며 어머니는 처진 눈꺼풀 한 쌍을 앙증맞게 그려 넣었다. 그리고 지금, 두개골이 깨지고 척추가 부러진 아들의 시신 앞에서 그 어머니가 흘리고 있을 피눈물을 생각하니 나 또한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야 나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어머니들의 피눈물을 끌어다 묻으며, 돈 없고 배경 없는 가련한 민중의 아들들만 남아 서로 때리고 맞으며 지켜가는 이 안보란 대체 누구의 것인지를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평화가 무엇이냐,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 복직하는 것이 평화요,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요, 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농토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평화유랑단을 이끌었던 문정현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탈세 따위 이력으로 점철된 자들이 지금 대단한 애국자 행세들을 한다.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자들이 이끌어가는 나라에 바칠 애국심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에 북한이 연루되었다고 물고 늘어지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믿고 싶어서 소설들을 쓴다. 소설은 원래 열망의 산물이니, 그 열망을 탓하진 않겠다. 다만, ‘한판 붙어보자’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렇게 믿고 있는 자신들이 제일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장동건의 대사처럼 ‘니가 가라, 하와이’다.

 

‘평화의 길은 평화’이다. 평화의 길에는 유보 조항도, 단서가 덧붙어서도 안 된다. 평화는 오직 평화 그 자체로써만 얻을 수 있다. 아, 저 거대한 전함들을 녹여 호미와 가래와 보습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저 어머니들의 피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인가.

 

나는 '군대없는 세상'을 꿈꾼다. 이 비통한 뉴스의 행렬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20100410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