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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돌같은 체제 뚫는 낙숫물의 힘 / 박혜영

by 오직~ 2010. 4. 3.

자본주의 투기금융의 상징이 된 뉴욕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는 1650년대에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으로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높이 4미터짜리 담벽에서 유래했다.

끝도 없이 퍼져 나가는 각종 파생상품을 만들어, ‘투자’란 ‘투기’의 파생어에 지나지 않음을 몸소 입증했던 월스트리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계 금융대란의 진앙지이자 이를 핑계로 미국 국민들에게 구제금융을 끊임없이 요청하여 배당금 잔치나 벌이는 밑 빠진 독이기도 한 곳이다.

 

오직 기업과 자본가들의 이윤만 지키려는 이 견고한 담벽에 균열을 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평생의 노동으로 마련한 서민들의 집을 각종 현란한 모기지 대출과 이자로 가로채 가는 이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바로 미국 작가인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보여준 것이다. 1853년에 나온 이 단편소설은 ‘월스트리트 이야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윤만 좇는 투기꾼들과 이들의 투기행위를 세탁해주는 법률가들이 득실대는 견고한 금융자본주의의 성벽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어느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는 바틀비라는 이름의 필경사를 채용하는데, 그는 처음 며칠간은 변호사가 요구하는 대로 지극히 추상적인 법률 서류들을 매우 기계적으로 베껴 쓰는 일을 잘 견뎌주었다. 터키와 니퍼스라는 이름의 다른 필경사들은 베껴 쓰는 작업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오전과 오후로 나눠 서로 번갈아가면서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는 데 비해 바틀비는 하루 종일 그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착실함과 근면함에 반한 변호사는 여타의 심부름도 시킬 겸 베껴 쓴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하는 일도 시킬 겸 바틀비를 가까이에 두게 되었다.

 

흐려진 교육현장에서 상품이 되기를 거부하며 자발적 퇴교를 감행한 학생도, 교단을 떠난 교사도 있다. 총수 일가를 위해 삼성의 온갖 비리와 비자금을 세탁하며 부귀를 누리는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한 변호사도 있다. 모두들 “아니오”라고 마음속 깊이 되뇔 때 견고한 자본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한사코 대조작업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변호사가 심부름을 시켜도, 필사본을 대조하자고 해도 일개 종업원인 바틀비가 자신의 고용주에게 놀랍도록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침착한 태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온건한 거부에 변호사는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다가 나중에는 짜증과 화를 내게 되고 마침내는 그를 떨쳐내기 위해 사무실을 옮겨버리는 황당한 행동까지 하게 된다. 바틀비는 자신이 왜 필사본 대조를 거부하는지, 나아가 변호사의 다른 요구는 물론이고 종국에는 왜 필경일마저도 거부하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사무실 한구석에 정물처럼 서서 창문 너머로 월스트리트의 벽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바틀비의 조용한 거부는 지난 30년간 무엇보다도 ‘안정’을 가장 중시하며 월스트리트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왔던 변호사에게 큰 혼돈과 충격을 주었다. 돈으로 꼬드기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보면서 변호사는 바틀비가 자신의 자선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지만 그때마다 듣는 대답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일 뿐이었다. 바틀비의 온건한 거부는 월스트리트 담벽을 무너뜨릴 만큼 혁명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아무런 사유 없이 그 체제를 그대로 베껴내던 변호사의 삶에는 어떤 깨달음을 낳았다.

 

“난생처음으로 가슴을 찌르듯 밀려오는 우수의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껏 나는 감미로운 슬픔밖에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유대감이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어두운 우수로 끌어들였다. 형제애의 우수! 나나 바틀비나 다 같은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이 명랑하다고 여기지만 불행은 멀찌감치 숨어 있어서 우리가 불행이 없다고 여길 뿐이다.”


마침내 바틀비의 수동적인 저항은 부랑자 구치소에서 음식마저 거부하는 데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을 택한 바틀비의 저항 이후 변호사는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수취인의 사망으로 반송된 우편물을 뜯어보고 소각하는 일을 해온 것이다. 자선헌금이 들어 있었지만 누군가가 구제되지 못한 채 죽었거나, 희소식이 들어 있었지만 누군가는 모른 채 절망하며 죽었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제때에 제 손에 닿지 못한 뒤 현대적 처리시스템 속에서 기계적으로 분류되고 소각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바틀비는 인간다운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거대한 담벽이 서 있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똑같이 숭고한 인간을 이윤을 위해 마음대로 모욕하고, 마음대로 해고하면서 기계부품처럼 취급하는 비인간적인 고용체제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벽 안에 들어가기 위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라고 세뇌시키는 교육체제 속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누구라도 피라미드의 정상에 설 수 있는 것처럼 기회의 자유를 떠들지만 실제로는 그 가파른 벽을 아무 장비도 없이 모두들 오르느라 진만 뺄 뿐이다. 가끔 월스트리트 변호사의 호의처럼 아무 스펙도 없는 저소득층을 위해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이라는 것을 실시하기도 하지만 누군들 그런 딱지까지 달며 오르고 싶겠는가!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주위에도 바틀비처럼 자발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에서 상품처럼 바코드나 달고 싶지 않다며 자발적 퇴교를 감행한 학생도 있고, 기독교 정신을 외면한 채 명품 소비자나 유혹하려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한 학교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며 교단을 떠난 교사도 있다. 총수 일가를 위해 삼성의 온갖 비리와 비자금을 세탁하며 부귀를 누리는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한 변호사도 있다.

 

월스트리트의 거대한 벽은 어떻게 무너질 것인가? 그 벽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모두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마음속 깊이 되뇔 때 그 벽에 균열은 가기 시작할 것이다.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20100403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