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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뒤끝의 가슴앓이 / 정석구

by 오직~ 2010. 2. 16.

 

올해도 설 명절을 맞아 어김없이 800리 고향길을 다녀왔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게 1970년대 중반이었으니 벌써 서른 번이 넘는 귀성전쟁을 치른 셈이다. 이제 좀 무뎌질 때도 됐으련만 고향을 갔다 오면 늘 가슴 한쪽이 묵직하다.

 

지난 주말 서울을 출발한 뒤 열 시간 가까운 운전 끝에 자정이 넘어 시골집에 도착했다. 팔순이 넘은 노부모가 잠결에 일어나 반가이 맞는다. 아늑한 안방에 앉자마자 전날 있었던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 얘기부터 꺼내신다. 전교생이 54명인데 이번에 5명이 졸업했단다. 취학 대상 마을이 30여개니 한 마을에 초등학생이 겨우 한두명꼴이다. 한때는 학년마다 두 반씩 전교생이 700명이 넘었다. 2㎞ 남짓 떨어진 다른 초등학교는 10여년 전에 이미 폐교됐다. 가을운동회 때마다 만국기가 휘날렸던 교정은 잡초만 무성한 채 황량하다.

 

다음날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마을 앞 냇가를 둘러봤다. 영산강 하류에서 민물장어가 올라올 정도로 맑았던 냇물은 이제 콘크리트 보에 막히고 축산폐수로 오염된 지 오래다. 상류지역에 한우를 키우는 축산농가가 10곳이 넘는다. 적게는 10~20마리, 많게는 100마리가 넘는 곳도 있다. 영세하다 보니 가축분뇨 정화시설을 제대로 갖추길 기대하기도 어렵다. 4대강 수질을 개선하려면 강 지류로 흘러드는 이런 축산폐수나 생활오수부터 정화하는 게 순서일 터이지만 누구 하나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을 앞 산기슭에는 돌 파쇄 공장이 들어섰다. 큰 돌을 잘게 부수면서 나오는 돌가루 때문에 농사를 망치고, 돌 깨는 소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며 시골 노인네들까지 나서 천막농성을 벌였다. 그래도 석재공장은 온갖 편법과 위력을 동원해 여전히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탐욕스런 자본과 사실상 이를 방조하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공기 맑고 쾌적했던 농촌은 하루가 다르게 파괴돼 간다.

 

텅 빈 들녘 한쪽에는 지을수록 손해만 보는 쌀농사 대신 딸기나 방울토마토, 멜론 등을 기르는 비닐하우스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동네에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이 농한기도 없이 땀을 흘리지만 손에 쥐는 건 거의 없다. 이제 농사도 투기가 돼 버려 한 해는 남고, 한 해는 손해, 한 해는 본전이다. 잘해야 겨우 현상유지나 하는 셈이다.

 

몇 해 전 독일 농촌지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넓고 끝없는 풀밭과 현대화된 축산시설 등 우리 농촌과 비교할 수 없는 천혜의 조건이 너무나 부러웠다. 하지만 더 부러운 건 농촌에 대한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이었다. 독일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이룬 부의 절반을 농촌지역에 쏟아부었는데,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먼저 충분한 식량 확보를 위한 농·축산업 육성, 둘째는 녹지공간으로서의 농촌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이유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2세 교육을 위해서라고 했다. 어린 시절을 잘 보존된 농촌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지내야 튼튼한 육체와 풍부한 감성, 그리고 이웃과 함께 사는 법을 갖춘 성숙한 인간으로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셋 중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우리 농촌 현실을 접할 때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이제 설 연휴가 끝났으니 정치권은 세종시, 4대강 사업, 6월 지방선거 등을 둘러싼 논쟁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들 머릿속에 이런 농촌 현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전통문화와 경제발전의 뿌리였던 농촌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명절 뒤끝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가슴앓이만 되풀이한다.

 

20100216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