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권력집단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떤 개인 혹은 집단을 주저앉히고자 할 때 동원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당사자의 명예에 먼저 공격을 가하는 일이다.
사실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이국적인 이름에 앞서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을사늑약 이후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의 전말이다.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재정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자국에서 들여온 고리의 차관(국채)은 1907년에는 1300만원으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나라가 빚 때문에 일제에 더욱 심하게 종속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서상돈과 여러 인사들이 1907년 대구를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나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갔다. 민족적 자각에서 비롯한 거대한 자강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접한 일제 통감부가 국채보상운동 파괴공작에 나선 것은 그다음 순서였다.
통감부가 사용한 수법은 무엇이었을까? 이 운동의 주도세력이 기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을 앞세워 그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었다. 운동에 적극 동참한 <대한매일신보>의 영국인 사장 베델과 총무 양기탁이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그들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무죄판결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들이 횡령의 모함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국채보상운동은 타격을 받았고 그 주체세력도 분열되었으며, 운동의 동력은 결국 소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세력이 민족의 자강운동을 짓밟는 방법은 그토록 간단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나랏빚은 더욱 쌓여만 갔다.
최근 검찰이 기소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무죄선고가 잇따르고 있다. ‘미네르바’ 박대성씨부터 ‘피디수첩’ 제작진 재판에 이르기까지. 이를 둘러싸고 마치 사법부와 입법부·행정부가 대립하는 듯한 대논전이 벌어지고 있다. 개별 사건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 독립을 뒤흔드는 사태는 우려스럽다. 법원 비판에 앞서 근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을 일단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규정한 후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그들을 법정에 세우면, 그후 재판과정을 거쳐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기소세력에게는 손해날 일이 없다. 대중은 흔히 양비론에 기울거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양가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한 것도 결국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검찰의 기소독점권이나 피의사실 공표 문제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들썩이는 상황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다. 올해 들어 수많은 사건에 묻혀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지만 이 사건은 혹시 한국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여성 정치인의 명예에 손상을 가한다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후 국채보상금 비소(費消·소비와 같은 말) 사건과 같은 판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20100123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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