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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아이의 노래 / Peter Handke

by 오직~ 2009. 9. 12.

 

아이의 노래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가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 일 뿐인데 그것이 나 일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때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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