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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이리 _ 장률

by 오직~ 2008. 11. 14.

 

여자, 주인공 - 세상이 던지는 삶의 상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꾹꾹 참아내거나, 분노로 폭발하거나, 바보로 살아가거나..

말없이 밥상머리에 앉아 지독히도(?) 맛없는 밥을 꾸역꾸역 삼키는 가족의 이미지..

섹스 장면과 더불어 발가벗은 남자의 나신은 적나라하게 등장하고..

소수자의 불행과 소통의 부재..

무언극을 하듯 말없는 대화와, 

일상의 잡음으로 영화음악을 삼고..

지루하기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영화는 이어지다가 낭떠러지로 밀려나기 일보 직전 인생의 서늘한, 섬뜩한 상황묘사로

눈물조차 사치로운 감정으로 만드는 悲劇 !

 

그의 영화에서 여실히 보여지는 장면장면들이다.

어디까지가 산 목숨의 댓가일까

여자(약자, 소수자)는 남자의 놀잇감이고, 권력의 희생양이며 시대의 제물이다.

답답하며 암울하기 그지없는..

 

특히 "이리"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속알맹이 서로 닿지 못하는 언어_진심의 불통으로 아픔이 더욱 크다!!

중국의 어느 소도시같은 '이리'의 황량함속에서 모질게 살아남아 살아가는 남매의 죽음같은 삶은

그대로 이어질 뿐!!!

사는게 아니라 쫓기는 사람들..

늘 가슴에 무거운 짐 하나 얹혀 가지고 극장문을 나서게 하는 그의 영화들.

 

 

감독 : 장률 2007作

배우 : 윤진서, 엄태웅

20081113중앙시네마

 

 

 

 

 

 

 

 

 

 

 

 

 

 

 

 

 

 

 

 

 

 

 

 

 

 

 

 

장률의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산다. 기댈 곳을 찾다가 뺨을 맞고 조롱당한다. 또다시 배회하고 끝내는 도망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혹독한 ‘망종’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경계’를 넘었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추방자라는 낙인과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률의 ‘사람들’은 그래서 또다시 휘청거린다. 쉴 곳을 찾다가 아랫도리를 약탈당하는 상황에도 처한다. 어찌할 수 없다. 넋을 놓고 떠돌 수밖에는. <중경>에 이어 개봉하는 <이리>는 <당시>의 아파트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장률의 ‘사람들’이 네 번째로 다다른 지옥문이다. 베이징과 몽골과 충칭을 거쳐 익산으로 흘러든 장률의 ‘사람들’에겐 어떤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도시의 중국어 학원과 경로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진서(윤진서). 30년 전 대형 폭파사고의 여파로 정신이 성하지 않은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하춘화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주워들은 ‘니 하오마’를 중얼거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이다. 언제나 방긋하는 그녀의 친절을 그러나 이곳 남정네들은 철저히 유린한다. 한편, 택시 운전을 하는 진서의 오빠 태웅(엄태웅)은 앞가림 못하는 동생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셈 못해서 지갑을 통째로 건네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유산으로 번번이 하혈하는 진서 앞에서 그는 말을 잃는다. 커피 심부름을 대신 갔다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태웅은 특별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리>는 반쪽 영화다. 한주 전에 개봉한 <중경>을 보지 않으면, 재중동포 장률 감독이 왜 굳이 1977년 한국의 이리역 폭발사고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느끼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시간(폭발)의 앞과 뒤, 전과 후를 다녀가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이 두편의 영화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두개의 장소 때문이 아니라 두개의 시간 때문입니다. 이제 겪어야 할 시간을 이미 다른 한쪽은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겪은 것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을 때, 나는 이제 겪어야 할 쪽을 보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씨네21> 637호, 영화평론가 정성일, 장률 감독의 신작 <이리> 촬영현장에 가다)

 

감독의 말처럼, ‘중경’의 사람들과 ‘이리’의 사람들은 같은 운명의 시간축 아래 놓여 있다. ‘중경’ 사람들은 미래에 저당잡혔고, ‘이리’ 사람들은 과거에 고착됐다. ‘중경’의 ‘쑤이’가 매춘을 원하는 남성들의 흥정을 받아내는 난간 뒤의 화려한 시가지와 ‘이리’의 진서가 첫 번째 하혈하는 다리 뒤의 황폐한 역사 풍경은 놀랍도록 겹쳐 보인다. 오지 않은 시간들과 이미 지나버린 시간들 사이에서 현실은 항상 ‘끼인’ 상태다. 그 안에서 더럽혀진 장률의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은 낮은 신음과 비명뿐이다. 고철을 줍는 쑤이의 아버지는 과거로의 회귀로 다가올 시간들을 지연시키려 하고, 미니어처 만들기에 심취한 태웅은 미래의 환상으로 지나온 시간들을 망각하려 들지만 모두 무용하다.

 

‘이리’는 단 한번의 폭발로 사라졌다. 지명 또한 익산으로 바뀌었다. 폭발 직전의 중경 또한 이태백이 노래하던 그곳은 아니다. 흉포한 도시의 유령 앞에서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계시 따위는 정치와 종교의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이리>의 마지막 장면. 진서는 애타게 기다리던 새 중국어 선생님 쑤이와 마주친다. 영화에서 둘의 대면은 불가능한 바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어이 장률 감독은 두 사람의 마주침으로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다. 쑤이와 진서의 마주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두 사람의 눈빛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분노와 희망이 읽히는가. 어쨌든 장률의 ‘사람들’은 고단한 도피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진 벗어남이야말로 장률의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지이니까 말이다.

= 씨네21 이영진

 

 

 

 

 장률 vs 정성일 대담 [1]

 

장률 vs 정성일 대담 [2]

 

장률 vs 정성일 대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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