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패배한 자의 복수로서의 글쓰기 / 김윤식

by 오직~ 2008. 9. 8.

 

내 아이를 죽인 자를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신이 먼저 용서해도 되는 일일까. 이 큰 물음에 연약한 인간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작품 <벌레 이야기>(1985)에서 작가 이청준씨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 바 있소. “없다”라고. 씨가 연약한 자 쪽에 선 증거이오. 그 연약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의 하나에 글쓰기라는 것이 있소. 이청준씨는 이 글쓰기에 신명을 걸지 않았을까. 씨의 견해를 다듬어 말해보면 이렇소.

 

글쓰기의 욕망이란 애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질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자가 그 패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위로와 그를 패배시킨 현실을 자기 이념의 질서로 거꾸로 지배해 나가려는 강한 복수심에서 비롯된다는 것. 이런 욕망엔 독자 따위란 안중에도 없소. 그러기에 그의 글쓰기란 자기 내면의 ‘일기’에 지나지 않는 것. 최초의 독자가 자기인 까닭이오. 여기서 한발 나서면 편지형식이오. 그 다음 단계가 다중을 상대로 한 소설질 하기. 여기에서의 승패는 글 쓰는 사람의 모습을 은밀히 숨기고 있음에 달렸소. 글 쓰는 자의 시선이 깊이 숨겨진 글일수록 독자와의 싸움에서 세련된 전술을 구사한 글이 되는 셈. 글 쓰는 자의 복수심과 지배욕이 강할수록 그의 얼굴과 시선은 더욱 음흉하게 숨어들기 마련이니까.

 

복수와 지배(해방)로 요약되는 이청준식 창작방법론은 아직도 유효할까. 여기에는 찬반이 있을 법하오. 장흥 출신 후배 작가 이승우씨의 <오래된 일기>(<창작과 비평>, 2005년 여름호)는 어느 편일까. 이승우씨도 문제 삼은 것은 문학의 애초의 욕망이오. 현실질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자의 복수 행위가 글쓰기의 욕망이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내면 문제인 것. 일기에 속할 수밖에.

 

여기서 잠시 <오래된 일기>를 볼까요. 여기 한 사내가 있소.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었소. 어느 날 사탕을 훔치는 장면을 급우에게 들켰소. 어째야 할까. 급우가 갑자기 죽거나 벙어리가 되라고 저주할 수밖에. 또 아비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얼음과자를 사 먹었소. 눈치 채기 전에 아비가 죽기를 바랄 수밖에. 그 아비가 죽었소. 고아가 된 그가 삼촌 집에서 자라며 사촌과 경쟁할 처지. 그는 사촌이 없어졌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던가. 이 모두는 현실질서와의 싸움이지만 낱낱이 패배할 수밖에. 이 패배의 상처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위로와 그를 패배시킨 현실을 자기의 이념의 질서로 거꾸로 지배하가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길은 일기 쓰기일 수밖에.

 

그런데 이런 자기만의 일기가 아무런 관련 없는 사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어떠할까. 이 물음은 작가 이승우씨가 작가 이청준씨에 대해 항의 혹은 비판을 한 것이라 할 수 없을까. 그 일기로 말미암아 사촌의 인생이 망가져 시방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으니까. 임종 자리에서 사촌이 내보인 것이 ‘나’의 젊은 날의 일기였다고 할 때 ‘나’는 과연 무죄일 수 있을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이 윤리감각에 대해 이번엔 이청준씨가 대답할 차례. 패배한 자의 복수심으로서의 글쓰기란 한갓 ‘오래된 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벌레 이야기>의 작가는 ‘조만간’ 이에 답하리라 믿을 수밖에. 그래야 우리 문학도 한층 웅숭깊어질 테니까. 이렇게 속으로 뇌고 있을 때 하늘은 끝내 ‘조만간’을 회수해 가고 말았소. 공은 이젠 별 수 없이 이승우씨에게 넘어갔소.

 

20080906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