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미술 기행 /
케테 콜비츠의 유명한 반전 포스터를, 얼마 전 고교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았다. 히틀러의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깊은 울림을 전해 주는 콜비츠의 그림을 보러 베를린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빗속에 물어물어 찾아간 그의 무덤에 두고 온 흰 장미는 이미 바람결에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구원의 메시지는 깊은 슬픔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일까, 콜비츠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검고 참혹한 상처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절망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 버텨내는 어머니의 굳센 팔뚝과 강인한 눈동자를 닮아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마침내 세상의 어머니가 된 케테 콜비츠. 그의 석판화는 오늘도 심장이 찢겨져버린 환부를 만져보라고 우리의 손을 천천히 잡아끈다. 세상의 슬픔을 끌어안으며 새긴 석판화들. 이 그림을 침묵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의 그림이 우리의 잠들어있던 목소리를 어떻게 깨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과 기름의 반발원리를 이용하여 작업하는 것이 석판화다. 이것은 타협이 불가능한 지점에서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콜비츠의 예술가 정신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석판에 그림을 그린 뒤 물을 떨어뜨리면 그림이 없는 부분에만 물이 스민다. 꿈조차 쉽게 다가서지 못할 만큼 상처가 깊은 곳에서 콜비츠의 저항은 시작된 것이다. 콜비츠의 그림은 선명한 고통의 현장에서 출발하였고 그의 삶을 송두리째 걸고 싸워나갔다.
<독일 어린이의 굶주림>(1924)은 전후 독일 사회의 어린이들이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밥그릇 하나에 모든 희망을 담고 있는 슬픔의 무거운 기록이다. 전쟁은 이 아이들에게서 순식간에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이제 더 이상 이 아이들을 보호해 줄 부모나 집, 학교는 없다. 폐허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공포의 생생함을 잊을 겨를도 없이 아이들은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빈 밥그릇을 높이 치켜드는 것 뿐이다. 이 아이들의 앙상한 팔뚝과 웃음이 사라져버린 퀭한 눈동자는 안전한 우리의 밥상을 부끄럽게 한다.
겁에 질려 동공이 커진 눈, 추위에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 저 아이들은 앞으로도 더 험한 시간들을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밥그릇을 채워 줄 따뜻한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비어있는 오른 쪽 공간처럼 아무도 이 아이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그림 속 상황이 지금의 상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이 그림은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전쟁은 아직도 짙은 포화 속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이 그림 같은 상황으로 내몰고 있으니까.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자기 방어수단도 갖지 못한 아이들은 가장 큰 피해자로 지금 이 순간에도 밥그릇을 치켜들고 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이해관계, 혹은 민족적 갈등이나 종교적 입장 차이는 전쟁의 허울 좋은 구실일 뿐, 아이들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갈 그 어떤 명분도 제시할 수 없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또 전쟁은 가장 극명한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이며, 설령 더 나은 이념이나 사회를 지향한다고 포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죄악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방식은 절대로 평화로운 밥을 보장해내지 못한다.
밥은 존엄을 넘어선 삶의 육화이며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위엄이다. 이 그림 속의 비참한 사회 현실이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만 자행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경쟁에서 배제된 채 고통 받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아이들을 본다면 이 그림은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다. 그럴 때 빈 밥그릇은 냉혹하고 불평등한 현실에 저항하는 절박한 외침일 수도 있다. 또한 치켜든 손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공감하며 연대의식을 찾아낼 수도 있다. 오른쪽은 정당한 권리, 옳은 것, 주인인 것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곳이 비어있다. 우리가 누리는 현재가 이 아이들의 빼앗긴 권리를 외면한 채 보장된 안위라면 이것은 정말 옳은 것인가.
그림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은 과도한 긴장에서 벗어날 때 가능해진다. 예술 작품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주눅들지 말자. 설령 논술 문제로 출제돼 우리에게 무언가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경우일지라도. 사람이 있고 그 뒤에 예술 작품이 태어났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가 지닌 세상을 편견 없이 대하려 하듯이 자유롭게 그림을 만난다면 우리는 매력적인 친구를 갖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아는가. 그러다가 누구의 달콤한 고백처럼 어느 날 그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지.
케테 콜비츠는 부당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 저항과 절망을 우리 앞에 펼쳐놓고있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 제발이지 침묵하지 말라고, 이것은 네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들이라고. ‘살라고 낳아 놓았더니 죽으러 가는구나.’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바라보는 어머니 케테 콜비츠는 피눈물로 석판화를 새겼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쓸쓸하게도 현재진행형이다. 정지원/시인 |
20070108한겨레
'w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승의 기운이 현신한 제자 (0) | 2007.01.12 |
---|---|
절망하라, 그러면 절망에서 벗어나리 (0) | 2007.01.12 |
역사 참극을 상상할 수 없다는 그대에게/서경식 (0) | 2006.12.08 |
죽고싶다 죽고싶다 엄살부리지 마라! (0) | 2006.12.08 |
강남, 이러다 서라벌 꼴 난다/우석훈 (0) | 2006.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