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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1주일 정도 머물면서 전남대에서 3번의 강연과 특별강의를 했다. 인문학연구소 주최 강연회의 연제는 ‘난민과 국민 사이-팔레스타인과 재일조선인’. 이어서 미술과 신경호 교수 초청에 따른 특강 ‘오토 딕스(Otto Dix)와 유럽 리얼리즘’. 3번째는 철학과 주관 ‘상호문화철학의 문제들’을 다룬 국제회의에서 ‘일본 국민주의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모두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은 적극적이고 진지했다.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일본 학생들과는 다른 인상으로, 호감이 갔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한테서 들은 의견은 일본 학생들과 공통된 것이었다.
“선생은 팔레스타인 난민과 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상상력을 지닐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선생들이나 선배들은 광주 5.18을 비롯한 고난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지만 우리로선 아무래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론 그것을 억압이나 강제라고 느끼게 된다.”
이 젊은이들을 비난하는 건 무의미하며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여기엔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난문(難問)이 암시돼 있다. 바로 이 난문 때문에 프리모 레비 등 ‘시대의 증인’들은 고민했다. 우리도 고민하며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독일 화가 오토 딕스도 또한 이 난문과 격투를 벌였다. ‘시대의 증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1891년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 재능을 인정받아 드레스덴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조국애’를 앞세운 어른들 선동에 넘어가 많은 젊은이들이 앞다퉈 전장으로 향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영웅적이고 로만틱한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23살의 대학생이었던 딕스도 이 열광적인 기분을 동시대 청년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자원입대해 최전선에서 병사로서 전쟁을 경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체험한 독일 예술가는 적지 않다. 하지만 딕스만큼 가열차게 최전선을 구석구석 핥듯이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사상 첫 총력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독가스, 기관총, 항공기, 잠수함 등 근대무기가 대대적으로 사용됐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지대인 서부전선에서는 장기간 참호전이 이어졌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이상 계속됐다. 두 진영 합해 대체로 6500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동원돼 그들중 약 1천만명이 전사하는 사상 유례없는 소모전이었다. 딕스가 실제 체험한 전쟁은 결코 영웅적이지도 로만틱하지도 않았다.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사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논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짓거리!” -딕스의 전장일기에 나열돼 있던 글들이다.
그러나 전후 독일사회는 극도의 인플레 속에서 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이 소외당하는 한편으로 나치스 등 극우세력이 대두하는 사회불안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너무 일찍 전쟁의 기억을 과거로 흘려보내고 다음 전쟁을 향하여 난 가파른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딕스의 연작 판화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6년 뒤인 1924년에 간행돼 발표와 동시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비평가는 그 작품을 “오싹할 정도의 인간 망각벽을 깨부순다”고 평했다. (위 그림은 그 중 한 점인 <부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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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경고한대로 두번째의 세계대전이 일어나 첫번째보다 훨씬 더 심대한 파괴와 살륙이 자행됐다. 제1차 대전 종전으로부터 90년. 제2차 대전 종전으로부터 60년. 인류사회에선 아직 전쟁, 파괴, 살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오싹할 정도의 인간 망각벽”은 변함이 없다.
앞서 얘기한 학생들의 의견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그 말대로, 타자의 고통이나 과거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을 지니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에겐 그런 상상력이 있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건 불성실하며 심지어 위선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방기하는 순간 시니시즘(냉소)이 개가를 올리고 참극이 반복된다.”
20061208 한겨레
번역=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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