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기차 타고 경북 봉화 오지 눈꽃 여행
분천역~승부역 ‘낙동강 세 평 하늘길’ 12.1㎞
하늘도 땅도 ‘세 평’, 철길·물길 거슬러 올라
눈송이 어깨 토닥이고 ‘올챙이’ 튀어 오르네
느리고 오래 달리는 기차에 올라탔다. 지난 12월25일, 서울역에서 경북 봉화 분천역까지 5시간3분. 베트남 다낭보다 멀다.(비행시간만 따지면 그렇다.) 서울~영등포~수원~천안~오송~청주~충주~제천~단양~풍기~영주~봉화~춘양을 거쳐 분천역이다. 서울에서 경북 북동쪽까지 브이(V)자로 꺾어 들어가는 기차 안에선 온통 눈 생각뿐이었다. ‘충북 오송엔 눈 왔네’ ‘소백산 아래 풍기엔 눈 안 왔네.’ ‘여기(영주역)부턴 앞으로 달리던 기차가 뒤로 달리네. 눈은 안 오네.’ 넓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탁 트인 고립감’이야말로 장거리 기차 여행의 매력이라 생각했다. 5시간이 훌쩍 지났다.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 4851)가 분천역에 도착했다. 역전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담담했다. 전날만 해도 이번 여행(출장)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철석같이 믿었던 일기예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12월26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일기예보는 ‘눈과 비’였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하늘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예보를 ‘흐림’으로 바꿔 버렸다. 애초 계획한 ‘오지마을 눈꽃 여행’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대안은 없었다. ‘눈꽃’을 떼고 그냥 ‘오지마을 여행’을 하는 수밖에.
지난 12월26일 아침 8시 분천리 민박집을 나섰다. 햇빛 한 점, 눈 한 점 없는 그저 뿌연 날이었다. ‘그냥’ 오지 여행이라면 흐린 날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있는 만큼 보고, 본 만큼 느끼면 될 일이었다. 경북 봉화군 ‘오지’에 있는 분천역(소천면 분천리)과 승부역(석포면 승부리) 사이 12.1㎞를 걸을 참이었다.
지난 12월25일 분천역 ‘산타마을’ 철길 풍경. 김선식 기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 줄기는 경북 봉화군을 거쳐 안동호로 흘러들어 간다. 공교롭게도 강줄기는 봉화 석포역~승부역~양원역~분천역 철길 곡선을 따라 흐른다. 그중 분천~승부 철길과 물길 사이를 걷는 길이 있다. ‘낙동강 세 평 하늘길’(이하 ‘세 평 하늘길’)이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1963년부터 18년간 승부역에서 일한 김찬빈 역무원이 화단 바위에 쓴 시다. ‘세 평 하늘길’ 이름은 여기서 왔다. 하늘도 땅도 협곡에 가로막혀 ‘세 평만큼’ 좁다는 뜻이다. 길은 고요했다. 가끔 기차, 물, 새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시인 김광규는 그 적막함을 이렇게 썼다. ‘태초의 고요/ 시간의 맷돌이 멈춘/ 저 원시림의 골짜기는/ 마침내 한 마리의 산새를 풀어놓았다’(시 <승부 역에서> 중)
지난 12월26일 경북 봉화 분천역에서 비동승강장 가는 길, ‘월원’에서 바라본 풍경.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철길 다리를 지나 강을 건너고 있다. 김선식 기자
기적처럼 실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분천역에서 비동1교와 비동2교를 지나 ‘월원’에 닿을 무렵이었다. ‘세 평짜리 하늘’에서 ‘세 평 땅’에 내리는 눈을 맘껏 맞으니 맘이 들떴다. 눈송이는 어깨를 토닥이듯 천천히 내려앉았다. 낮엔 산 그림자를, 밤엔 달빛을 비춘다는 너른 강 ‘월원’의 잠수교 한가운데서 ‘선택받은 자’의 기쁨을 누렸다. 정면에 강물 위를 가로지르는 철길 다리가 보였다. 들뜬 마음에 문득 ‘저 다리를 지나는 기차와 달리기 시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천역에 전화를 걸어 오전 10시20분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가 분천역에서 승부역을 향해 출발한다는 걸 확인했다. 강물 위를 달리는 열차를 카메라로 찍고, 300m를 달려 짐승 아가리 같은 굴(터널)속으로 돌진하는 협곡열차의 백호 무늬 머리를 찍을 생각이었다. 어떤 사명처럼 감행한 무모한 도전은 터널 직전 ‘비동 승강장’에 열차가 1분간 정차한 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무모하고 부질없는 도전이었다.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 천천히 걸으면서도 강 위를 건너는 협곡열차를 또 봤으니까.
지난 12월26일 비동 승강장에서 터널로 돌진하고 있는 백두대간 협곡열차. 김선식 기자
오지마을에서 길은 각별하다. 분천역과 승부역 중간지점에 있는 양원역만 봐도 그렇다. 1988년 마을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탄원해 세운 국내 최초 민자 역사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역’이라고도 불린다. 대합실은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동네 구멍가게처럼 생겼다. 역이 없던 시절, 봉화 춘양장에서 장을 본 마을 주민들은 달리는 기차에서 이곳 철길에 장바구니를 던져두고 승부역에 내려 되돌아 걸어왔다고 한다. 양원역 옆 원곡마을에서 60여년 살아온 한 주민(81)은 “역이 생기기 전엔 철길 따라 걷다가 죽는 사람도 많았고 여행지로 알려지기 전엔 강가도 엄두를 못 낼 만큼 길이 험했다”고 회상했다.
양원역 대합실. 김선식 기자
‘
세 평 하늘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크게 세 구간으로 나눈다. 분천역~비동 승강장(4.3㎞)은 유독 강을 건너는 다리가 많다. 죄다 폭우가 내리면 건널 수 없는 잠수교다. 난간 있는 다리도 드물다. 폭이 넓어 위험하진 않다.(비동2교 기준 폭 4m) 비동 승강장~양원역(2.2㎞)은 ‘체르마트 구간’이라 불린다. 2013년 5월 분천역이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을 한 계기로 길 이름을 지었다. 이 구간은 ‘짐승 아가리 같은 터널’로 향하는 철길 다리를 건너며 시작한다. 길 대부분은 목제 난간이 있는 산비탈 길이다. 양원역~승부역(5.6㎞)은 긴 곡선을 그리는 터널과 강줄기 사잇길과 나무계단 길, 출렁다리 등으로 이어진다. 각 구간은 이따금 강가 자갈길과 흙길을 만난다. 철길과 물길 사이를 긴 곡선을 그리며 걷는 여행객들을 보면 눈에 대처하는 자세도 제각각이다.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수도승처럼 오로지 걷기에만 전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팔 벌려 온몸으로 눈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눈송이 흩날리는 산과 강 풍경을 바라보며 한동안 걷질 않는다.
강물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오래 들여다봤다. 눈송이가 마치 올챙이처럼 수면 위로 튀어 오른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수면에 비친 이미지였다. ‘이토록 오래 눈을 눈여겨본 적이 있던가.’ 눈 내리는 하늘, 강, 산, 철길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다 보니 분천역에서 12.1㎞ 거리인 승부역에 닿았다. 어느새 눈도 잦아들었다. 철길과 물길이 교차하다가 평행선을 그리고, 눈 내리길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들뜨다가 담담해지는 그 길에서 일상을 보았다. 지금 걷는 길이 오지일지언정, 지루함 없이 가끔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세 평' 하늘 뚫고 오지에 내린 눈꽃이 남다른 점 또한 바로 그 아기자기한 위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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