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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조커 _ 토드 필립스

by 오직~ 2019. 10. 10.

감독 : 토드 필립스 2019

배우 : 호아킨 피닉스, 재지 비츠, 로버트 드니로

20191007 서울극장


 

영화감독 오승욱이 회고하는 <조커>와 DC 빌런의 역사

눈보라가 몰아치는 황야를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어린 소년이 걷고 있다. 조금 전, 소년은 밀매꾼들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작은 몸을 부지런히 놀리며 그들을 도와 배 위로 짐을 옮겼지만 사악한 어른들은 소년을 배에 태울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들은 ‘콤프라치코스’라 불리는 자들이다. 어린아이를 납치하거나 사들여 얼굴과 몸을 인위적으로 변형시켜 괴물처럼 만들거나 난쟁이로 만들어 돈 많고 권력 있는 자들의 더러운 취미를 위해 팔아먹던 악당들이다. 현재와는 다르게 17세기에는 얼굴을 기괴하게 만드는 것이 성형수술이었다. 나라에서 어린아이의 몸과 얼굴을 변형시켜 매매하는 행위를 불법 범죄로 규정하고 콤프라치 코스들을 잡아들여 사형을 하는 엄벌을 내리자 그들은 소년을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이다.

악당들에게 버림받은 소년의 얼굴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잇몸과 이가 드러나 있다. 억지로 만든 웃는 얼굴이다. 게다가 그들은 소년의 코까지 칼을 대서 들창코로 만들어버렸다. 누구나 소년의 얼굴을 보면 처음에는 놀라고 그다음에는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남들에게 노리개가 되도록 만들어진 이 불행한 소년은 눈보라 속에서 얼어죽지 않기 위해 동상으로 부르튼 발을 빨리 움직이며 민가를 찾아 황야를 가로지른다. 멀리서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인가? 소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기의 울음소리다. 아기 울음소리를 향해 달려가는 소년. 아기의 울음소리는 죽어 누워 있는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아기 엄마는 죽었고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살아 있다. 눈보라 속에서 제 몸 하나도 어찌 못하는 이 흉측한 얼굴의 소년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누더기로 아기를 둘둘 말아 가슴에 품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눈보라 속으로 종종걸음을 쳐 달리기 시작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는 얼굴은 흉측하지만 저보다 약하고 어린 것들을 긍휼히 여기는 소년의 등장으로 장대한 비극을 시작한다.

펭귄, 투 페이스… 그리고 조커

그리고 90여년의 세월이 흘러 얼굴을 가려 자신의 정체를 속인 젊은 갑부 남자(사람들은 그에게 배트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가 자경단이 되어 폭력을 행사하는 미국 만화 <배트맨>의 이야기 속에서 또다시 웃는 남자가 등장한다. <배트맨>의 스토리 라이터 중 하나가 극장에서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를 원작으로 만든 폴 레니 감독의 영화 <웃는 남자>(1928)를 보고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소설에서는 얼굴은 흉측하지만 마음은 아름다운 남자였지만 만화에 등장한 웃는 남자는 거대한 악의 총합 그 이상의 인물로 탄생했다. 만화 <배트맨>의 초창기에는 자경단 액션 만화라기보다는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탐정이 등장하여 범죄자들의 행적을 좇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추리 만화였다. 배트맨의 범죄 해결 능력치가 높아지자 등장하는 악당들의 능력치와 존재감도 상승해야 했다. 존재감이 없는 그저 그런 악당들로는 독자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다, 배트맨만큼이나 존재감 있는 악당들을 탄생시키고 탐정 배트맨보다는 액션 히어로 배트맨으로 거듭나기를 독자들은 원하고 있었다. 드디어 1940년 <디텍티브 코믹스 배트-맨>이라는 타이틀에서 ‘디텍티브 코믹스’를 떼어내고 <배트맨> 타이틀로 시작된 1화가 공개된다. 새롭게 태어난 만화 <배트맨>에 새로운 악당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바로 캣우먼과 조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웃는 얼굴의 광대 화장을 한 이 기괴한 악당 조커는 괴도 루팡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사악하고 비열하며 잔혹하다. 조커가 루팡 흉내를 내며 범죄를 예고한다. 루팡은 범죄 예고를 하고 경찰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범죄를 완성하며 쾌감을 느끼는자다. 그는 범죄 예고가 자신의 정정당당한 게임 또는 멋이라 생각하는 자다.

그러나 조커는 경찰의 경비를 뚫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는 범죄 예고를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이 할 짓은 다 끝내놓고 있다. 조커가 예고한 범죄를 막기 위해 배트맨이 잠복했지만 그는 이미 헛수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농락당하는 경찰들을 구경하기 위해 조커가 범죄 현장에 숨어든다. 이것이 이후 80여년에 이르는 조커와 배트맨, 두 괴물의 첫 만남이고 첫 번째 싸움이다. 조커는 이상한 강도이고 살인자이다. <배트맨: 웃는 남자>의 에피소드를 보면 조커는 어떤 갑부를 어느 날 몇시에 죽이겠다고 예고한다. 경찰과 배트맨이 갑부를 지키기 위해 모인다. 그러나 조커는 자신이 죽일 갑부에게 약효가 자신이 지정한 시간까지 지연되는 독약을 이미 주입해놓고 그가 자신이 정한 시간에 죽기만을 방 안에 앉아서 기다린 것이다. 조커는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 그는 경찰과 배트맨을 농락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이후로 조커가 하는 범죄행위는 타자들을 농락하고 조롱하여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채우는 것, 그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

이후 액션 만화 <배트맨>에 걸맞은 악당들이 속속 등장한다. 배불뚝이 갑부 펭귄. 법률가 출신의 투 페이스. 이니그마 리들러. 포이즌 아이비. 미스터 프리즈. 스퀘어 크로우. 애인인지 아니면 적인지 분간이 안 가는 할리퀸. 그런 악당들을 빌런이라 부른다.

빌런, 빌리지에 사는 농노들. 그들은 더럽고 가난하며 사악하다. 그들은 오랜 시간 귀족들에게 받은 수탈과 억압의 고통을 언제라도 갚기 위해 칼과 도끼를 등 뒤로 숨기고 숲속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귀족들이 등을 보이는 순간 달려들어 그들의 목을 따고 진흙탕에 던져버릴 것이다. 신에 가까운 아니, 재림한 예수 슈퍼맨과 갑부이며 고결한 영혼을 지닌 배트맨 같은 고귀한 자들이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도록 항상 괴롭히는 어두운 눈동자들에게는 악당이란 호칭보다 빌런이 더 어울린다. 매회 새로운 악행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던 만화 속 빌런들에게 시련이 온다. 빌런들을 모두 퇴치한 것은 배트맨이나 슈퍼맨 같은 히어로들이 아니었다. 빨갱이 사냥의 광풍이 불어닥치던 1955년. 만화검열위원회가 설립되어 만화 속 범죄 행위와 폭력 묘사에 대한 규제가 심해진다. 섹시하고 퇴폐적인 캣우먼과 조커는 규제 속에서 점점 무력한 빌런이 되다가 조커는 1964년 아예 사라져버린다. 배트맨도 어쩌지 못한 빌런, 조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들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저 먼 우주의 외계 생명체들이다. 배트맨은 범죄 액션 만화에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영역까지 타의에 의해 이야기를 확장한다. 조커는 몇년 동안 잊힌 악당이 되었다. 그리고 1966년 TV시리즈 <배트맨>에서 조커는 다시 등장한다.

1970년대 초반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조커의 만남은 만화책이 아니고 1966년에 만들어진 TV시리즈 <배트맨>이 한국에 방영될 때였다. 어린 나에게 조커보다는 펭귄이 더 인상적이었다. 떠들썩하게 어릿광대 짓을 하는 조커보다는 음침하고 사악한 어두운 악당 펭귄이 더 세다고 느꼈었다. TV시리즈 <배트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배트맨과 함께 조를 이룬 로빈이란 소년이었다. 억지로 배를 숨긴 듯한 둔중한 몸과 박쥐 가면 아래에 노출된 사각 턱과 얇은 입술이 부자연스러운 배트맨은 썩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의 코스튬 색깔도 우중충한 청회색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빨강과 연두색의 알록달록한 옷과 노랑 망토를 입은 로빈의 날렵함이 어린 나에게 더 호감이 갔었다. 미국제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과 그 이후에 나온 <마징가 Z>로 나의 관심은 옮겨가고 이소룡과 왕우가 나오는 홍콩영화에 마음을 빼앗기며 세월이 흐른 후 1980년대 후반의 어느 날, 팀 버튼이 만든 <배트맨>(1989)이 극장에서 개봉했다. 만약 어린 시절 한국에서 미국 만화를 볼 수 있어 만화 <배트맨>에 열광했었다면 팀 버튼의 <배트맨>에 남다른 감회를 느꼈겠지만 미국 만화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고, 그나마 본 몇편의 미국만화는 한국 만화와 일본 만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체와 이야기 방식이라 재미를 못 느껴 인연이 전혀 없었다. 그 유명한 히어로 슈퍼맨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장철과 왕우 영화의 비극을 보며 자란 나에게 슈퍼맨은 따분하고 유치하다고 생각됐다. 영화 <슈퍼맨>을 본 이후 미국 만화의 히어로 이야기들은 모두 단순하고 유치한 것들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유명한 배트맨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 영화를 보았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영화 <슈퍼맨>(1978)보다는 나았지만 그냥 그랬다.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도 그냥 그랬다. 마피아의 똘마니였던 조커가 배트맨과 조우하여 화학약품이 가득 찬 탱크에 빠지고 피부가 표백되어 무시무시한 복수의 화신이 되는 탄생 비화도 애초 조커에 관심이 없었으니 그냥 그랬다. 하지만 프린스가 만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광란의 카니발을 벌이며 마구 살인을 하는 조커의 모습을 보고서 무슨 악당이 저렇게 뜬금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질려버렸다. 저건 제정신이 아닌 미치광이라 생각했다.

만화 <배트맨: 킬링 조크>와 <조커>

내가 어렴풋이 알던 조커라는 캐릭터가 저런 미치광이였나? 했었다. 그 뿐이었다. 오히려 두 번째 나온 팀 버튼의 <배트맨2>(1992)를 보고 열광했고, 펭귄의 팬이 되었다. 미국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최초 원픽은 펭귄이었다. 팀 버튼의 <배트맨> 이후에 나온 <배트맨> 시리즈는 나를 더욱더 미국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히어로물에서 멀어지게 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다크 나이트>(2008)의 오프닝. 마피아의 수하인 은행장의 협박도 안중에 없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 은행털이를 한 동료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왜? 그들은 나보다 비천하다. 이 끔찍한 자가 가면을 벗는다. 조커다. 돈이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인간들을 농락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인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룰을 조롱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거나 예기치 못한 아주 작은 불운이라도 닥치면 자신의 목숨도 끝장날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한판 놀아보는 것인가? 이 지독한 인간 혐오자, 또는 인간의 영혼 일체를 조롱하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처럼 보이는 저 자는 왜 저렇게 된 것일까? <다크 나이트>를 시작으로 나는 조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때마침 미국 만화들이 ‘그래픽노블’이란 이름을 달고 한국에 출판되기 시작했다.

“80년대 말, 미국 만화계 주류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또는 나처럼 만화 판매점 진열장 유리에 코를 들이대다시피했던 모든 이들이 인정했듯이, 그 당시 줄줄이 나온 <다크 나이트 리턴즈> <왓치맨> <배트맨: 이어원> <배트맨: 킬링 조크>는 정말이지 이 분야를 다시 설계해버린 걸작들이다. 프랭크 밀러를 비롯한 한 무리의 미친 영국인들이 보여준 새로운 발상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배트맨: 킬링 조크>, 앨런 무어, 브라이언 블런드, 팀 세일의 서문 인용)

2008년 <배트맨: 킬링 조크>의 서문을 쓴 팀 세일의 말처럼 미친 영국인들이 스토리를 쓴 <배트맨> 시리즈와 <왓치맨>, 새로 만들어진 <슈퍼맨> 만화들은 무척 새로웠다. 그중 <슈퍼맨: 레드 선> <슈퍼맨: 포 올 시즌>은 놀라웠고, ‘더 뉴 52’의 <배트맨> 시리즈와 조커가 단독 주인공으로 나온 두편의 걸작 만화 <배트맨: 킬링 조크>와 <조커>는 나를 매혹시켰다. 만화 <조커>의 화자는 마피아 똘마니 조니 프로스트. 그는 아캄 정신병원에서 출소하는 조커를 마중나간다. 조니는 출소한 조커의 모습을 보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극렬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조커가 도시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드는 욕을 하자 곧 안심하고 만다. 극심한 공포와 우스꽝스런 모습을 동시에 연출하는 위험한 남자. 조니는 조커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안도하는 실수를 범해 그나마 마피아 똘마니로 그럭저럭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지옥으로 빠지게 된다.

조니는 조커의 부하가 되어 조커가 벌이는 시산혈해의 광란을 모두 목격하고는 점점 겁에 질려 미쳐간다. 조니는 마지막 순간 조커에 대해 “그는 역병”이라고 말한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역병. 배트맨이 압도적인 힘으로 조커를 피범벅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조니는 확신한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배트맨도 절대로 조커를 고담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고. 만화 <조커>에서의 조커는 귀밑까지 입이 찢어져 있고 투 페이스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손가락 마디마디에 면도날을 박아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고 자기 주위의 모든 것들을 적이건 동료건 상관없이 살해한다. 그의 모든 광란의 살육은 오직 하나! 배트맨이 자신을 다리 위, 스모그에 싸인 달 아래에서 피범벅이 될 때까지 패주기만을 기다리는 자였다. 조커가 바라는 것은 배트맨에 의해 자신의 신체 훼손이 완성되는 것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 이은 거대한 나르시시스트 조커의 탄생이다.

<배트맨: 킬링 조크>는 영국에서 온 앨런 무어의 스토리로 만들어졌고, 조커의 탄생에 대한 새롭고 흥미로운 견해가 들어 있다. 조커는 무명의 가난한 코미디언이었고, 그는 생활고에 쪼들리다 자신이 전에 일하던 화학공장을 안내하면 돈을 주겠다는 갱들의 꼬임에 넘어가 당시 유명한 갱단인 레드후드 갱으로 변장하여 화학공장에 숨어들었다가 배트맨과 만나 화학 폐기물이 가득한 웅덩이에 빠져버린다. 화학 폐기물 때문에 온몸이 하얗게 탈색되고 얼굴도 비틀어진다. 그날 조커의 일진은 불행의 정점이었다. 아내가 사고로 죽고 범죄자가 되었는데 얼굴이 비틀어지고 머리털이 녹색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지? 배트맨이다.

조커는 배트맨을 괴롭히기 위해 경찰서장 고든의 딸에게 총을 쏘아 하반신 마비로 만들고 고든을 자신과 같은 미치광이로 만들기 위해 놀이공원을 거대한 고문의 카니발 장소로 만든다. 자신이 거듭된 불행을 경험하고 미치광이가 되었듯 고든을 자신과 똑같은 상황으로 내몰아 미치광이로 만들려는 것이다. ‘기억이 맞건 다르건 무슨 상관이야.’ ‘나의 과거? 지금까지 이야기한 나의 과거 중 이번 것이 진짜야. 하하하, 뭐 그렇게 심각해. 내 과거는 나도 몰라.’ 이 만화에 그려진 조커의 과거가 진짜일까? 혹시 배트맨을 자극하고 그를 끌어들이기 위한 재미없는 에피소드(배트맨의 말이다)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배트맨의 최고 파트너는 펭귄도 아니고 투 페이스도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다크 나이트>와 DC 만화들에 의해 조커만이 유일하게 배트맨 옆자리에 언급되는 최고의 빌런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진 배트맨과 빌런들의 탄생비화인 <고담>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펭귄은 조커 캐릭터에 가까웠다. 펭귄의 오랜 팬이었던 나는 미국 드라마 <고담>을 보면서 저놈의 유사 조커 펭귄을 집어치우고 진짜 조커를 보여줘라 마음속으로 외치기까지 했다.

드디어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졌다

나는 기다렸다. “누가 조커를 주인공으로 멋있는 영화를 좀 만들어줘요!”

2019년 드디어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 <조커>는 DC 만화의 판타지 세계와는 선을 긋고 리얼리즘의 세계 속으로 조커를 옮겨놓는다. 영화는 액션영화의 쾌감과는 다른 지점에서 쾌감을 불러오려고 한다. 만화 배트맨과 이전 영화 속의 조커를 세심히 선별하여 영화 속에 넣을 것은 넣고 뺄 것은 뺐다. 심지어 자경단의 유산까지도 영화 속 조커(호아킨 피닉스)에게 심었다. 재능이 없는 코미디언 지망생 조커에게 한신, 한신 물에 젖은 솜이불 같은 불행을 덮는다.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려고 하는 듯이. 조커가 알고 있는 수많은 기억 중 무조건! 나쁜 기억은 현실이었으며 좋았던 기억들, 특히 타자와 마음이 통했던 약간의 온기라도 지닌 기억들은 모두 꾸며낸 망상이다! 이쯤되면 조커의 폭발에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 <조커>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조커>의 개봉을 며칠 앞둔 어느 날. PC 모니터에 영화 <조커> 포스터를 보고 있는 12살 소년이었다면 어떨까? 15세 관람가이니 절대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기쁨은 누릴 수 없을 것이지만. 조커 포스터 앞의 12살 소년인 나는 이소룡도 왕우도 알랭 들롱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없다. 오직 내 머릿 속에는 지난 7, 8년 동안 보아온 DC와 마블 영화 속 히어로들만으로 꽉 차 있고, 엄마를 졸라 사서 본 그래픽노블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어찌어찌 힘들게 영화 <조커>를 보고 난 후의 나는 어떤 감정일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영화 <엑소시스트>(1973)를 보고 구역질을 하고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던 그런 기분이 될까? 아니면 쿵쾅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에서 극장까지 미친 듯 달려갔던 <암흑가의 세 사람>(1970)을 본 나의 모습일까?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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