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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길

“비석도 남기지 말라”던 박수량 등 청백리의 고장 전남 장성

by 오직~ 2017. 3. 26.

청빈한 선비의 삶이 500년을 밝히다


아무 데든 거닐며 봄마중하기 좋은 철이다. 바람 쌀쌀맞아도 햇살은 어디든 파고들며 온기를 키운다. 빈 나뭇가지들 썰렁해 보이지만 발치에선 이미 봄이 시작됐다. 봄기운은 뚜렷한데, 아직 마음 한구석이 황량하기만 한 것은 왜일까. 파내고 파내도 끊이지 않고 드러나는, 부정·비리로 얼룩진 혼탁한 정국. 곧고 바르고 청빈한 삶을 살아온 선인들, 청렴하고 결백한 공직자 청백리들이 새삼 그리워지는 때다. ‘청백리의 고장’ 전남 장성에 드리운 봄빛을 찾아갔다. 고찰 백양사에도, 축령산 숲길에도, 청렴했던 선비의 무덤가에도 아른아른 새봄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봄기운 느끼고 누리면서 얻어갈 것도 많은 여정이다.


‘백비’가 보여주는 청빈한 삶

장성의 고찰 백양사. 일주문 앞 국립공원 백암분소에서 쌍계루 앞 일광정까지의 탐방로엔 ‘청렴길’이라 쓴 팻말이 세워져 있다. 쉼터 이름도 ‘청렴쉼터’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직원들이 청렴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지정한 길이라는데, 느닷없이 웬 ‘청렴’일까. 장성군은 전국 공직자와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청렴문화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청렴 운동’을 펼치고 있다. 조선시대 장성 출신의 두 청백리, 아곡 박수량(1491~1554)과 지지당 송흠(1459~1547)이 그 바탕이다.


청백리 박수량의 묘. 봉분 앞 작은 빗돌이 명종이 하사한 백비다. 오른쪽 큰 빗돌은 1888년 후손이 세웠다.
청백리 박수량의 묘. 봉분 앞 작은 빗돌이 명종이 하사한 백비다. 오른쪽 큰 빗돌은 1888년 후손이 세웠다.


먼저 박수량의 묘로 가보자. 황룡면 금호리, 필암서원 부근이다.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가 초미의 관심사인 요즘 더욱 환하게 빛을 발하는 빗돌이 기다린다. 아무런 글씨도 없고 장식도 없는 흰 묘비, ‘박수량 백비’다. 박수량은 장관급인 한성부판윤·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중종~명종 대의 공직자다. 39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집 한 채 없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등 청빈한 삶을 지속하다 생을 마감한 선비였다. 그는 사간원 사간, 각 지역 관찰사 등을 하면서 청탁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을 가차 없이 파직하는가 하면, 백성들이 병마에 시달리면 조정에 약재 지원 요청을 하는 등 평생 강직·근면한 공직생활을 했다고 한다.



박수량이 궁핍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명종은 “듣건대,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때가 한 달에 절반이라는데…” 하는 편지와 함께 쌀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자식들한테도 “판서 벼슬에까지 올랐으니 그 영화는 과분한 것이다. 내가 죽으면 시호도 받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마라”고 했다. 그가 죽었을 때 집에는 장례비조차 없었다고 한다. <명종실록>에 “가속들이 장례 지낼 형편이 못 돼, 임금께 청하여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종은 묘지석을 하사하면서 “박수량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에다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누가 되는 일”이라며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빗돌을 그대로 세우라 했다. 이것이 백비다.


광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백비를 찾은 초등교사 이용진(34)씨는 “나라가 어지러운 때여서 그런지, 백비의 의미와 그 감동이 더 크게 다가오는 듯하다”고 말했다.

     

백비 방문 기관·단체 이름 전시 눈살

파릇파릇 새순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박수량 묘소 앞 백비는 밝고 소박한 옛 모습 그대로다. 한국전쟁 때의 총탄자국 말고 백비는 변함없지만, 주변 풍경은 옛 모습이 아니다. 박수량의 생전 당부와 달리 훗날 후손들은 ‘정혜공’이란 시호를 받았고(1805년), 백비 몇 배나 되는 크기의 빗돌에 그의 행적을 적어 묘 옆에 세웠다(1888년). 당시 문중에서 묘비를 새로 세우면서 봉분도 크게 단장했다는데, 박수량의 청렴한 삶과 어긋나는 일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더 어울리지 않는 건 묘소 들머리 주차장 옆에 세워진 전시실 외벽과 담장에 빼곡하게 적힌 ‘백비를 찾은 기관·단체’ 이름들이다. 청렴함을 배우러 왔다는 공무원이 자신들의 방문 사실을 널리 생색내는 꼴이다. 이 또한 박수량의 곧고 청빈한 삶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민가가 들어서 있는 박수량 생가 터.
민가가 들어서 있는 박수량 생가 터.


이웃한 홍길동테마파크 뒷산에 박수량의 생가 터가 있다. 홍길동테마파크의 숙박시설 ‘청백한옥’은 명종이 박수량 사후에 하사했다는 99칸 한옥(정유재란 때 전소)을 최근 77칸으로 재현해 지은 것이다.


또 다른 청백리 지지당 송흠은 ‘삼마태수’로 불린다. 지방관으로 부임하거나 이임할 때 여러 마리의 말을 거느리고 떠들썩하게 행차하는 여느 관리와 달리, 단출하게 짐을 싸 말 세 필만 이용했다고 한다. 삼계면에 그가 말년에 머물던 정자 관수정과 기영정이 있다.


백양사 숲길엔 야생화 빼꼼

백양사엔 봄빛이 얼마나 드리웠을까. 우화루 옆 ‘고불매’(천연기념물)를 들여다본다. 순천 선암사 무우전매, 담양 지실마을 계당매, 고흥 소록도 수양매, 전남대 대명매와 함께 ‘호남 5매’로 꼽히는 고매다. 350년 풍상을 겪어온 할아버지 홍매나무인데, 가지마다 홍조가 또렷하다. 붉은 꽃봉오리들이 무수히 돋아 한바탕 터질 채비를 하고 있다. 고불매는 고매 중에서도 개화가 늦은 편이어서, 만개한 모습은 3월 말에나 만날 수 있다. ‘고불’은 본디 모습의 부처, 본연의 옛 부처를 뜻한다. 1947년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하며, 이 나무가 고불의 기품을 닮았다 해서 ‘고불매’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양사 들머리 산자락에 피어나고 있는 노루귀.
백양사 들머리 산자락에 피어나고 있는 노루귀.

백양사 들머리에 핀 복수초.
백양사 들머리에 핀 복수초.
백양사 숲에서 만난 붉은대극 새순.
백양사 숲에서 만난 붉은대극 새순.


백양사의 또렷한 봄빛은 일주문에서 쌍계루에 이르는 1.3㎞ 길이의 탐방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 산자락에 쌓인 낙엽더미 사이로 복수초·노루귀·바람꽃 등이 고개를 들고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봄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야생화들이다. 백양사 들머리 내장산국립공원 백암분소 부근의 복수초는 이미 샛노란 꽃잎을 열어젖혔고, 산기슭의 노루귀와 변산바람꽃도 꽃봉오리를 밀어올렸다. 선명한 봄빛은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오르고 있는 붉은대극의 새순들에서도 느껴진다. 붉은대극은 뿌리를 약용으로 쓰는 다년생 초본이다. 선명한 붉은색을 띤 어린 새순이 길쭉한 꽃송이처럼 보여,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식물로 여긴다.


이런 이른 봄꽃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국립공원 사무실에 문의하면, 안내를 받아 꽃을 직접 살펴보며 백양사 생태탐방로 주변의 야생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한결같이 곧고 푸른 또 하나의 경관을 축령산휴양림의 편백나무·삼나무 숲에서 만나볼 수 있다. 조림가 임종국(1915~1987)이 사재를 털어 30년간 심고 가꾼, 2.9㎢ 넓이의 숲이다. 사철 푸른 숲을 거닐며 피톤치드 향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추암리·모암리·금곡마을 세 곳에 휴양림 들머리가 있다.


맥호리 난산(알산)의 김인후 통곡단.
맥호리 난산(알산)의 김인후 통곡단.

조선 중기 문신 하서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에도 들러볼 만하다. 김인후가 인종 승하 뒤 매년 기일이면 올라 곡을 했다는 맥호리 맥동마을 난산(알산)의 통곡단, 이를 기려 세운 난산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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