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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춘몽 _ 장률

by 오직~ 2016. 10. 26.

텅 빈 영화관에서 나 홀로 보다.

 

춘몽,, 일장춘몽,,

춘몽이라는 단어에서 나른한 성적 느낌을 받지 않았다.

허무, 냉소 따위의 한바탕 꿈 같은 삶이 읽혀졌지.

쉽게 '나'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이 꿈이었으면,, 어쩌면 삶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확신(!)으로 견디고 있는 인생들을 보다.

일말의 끊을 수 없는 '따뜻한 애정'과 함께

 

봄날의 꿈처럼 신기루처럼 나의 인생도 별 다를 바 없이

 

시월의 싸한 계절에 춘몽에 혼곤하니

영화 속 배우들과 한바탕 꿈을 꾼 느낌!

잠깐 나오는 단역들도 재미있다.

 

 

 

감독 : 장률 2016作

배우 : 한예리, 양익준, 윤종빈, 박정범, 이주영, 이준동/김의성, 백현진, 송호창, 조달환, 신민아. 강산에, 유연석, 김태훈

20161025인디스페이스

 

 

 

 

 

 

 

한예리가 추는 세 번의 춤

 

색색깔 천을 이어 붙여 하나의 보자기를 만든다. 그 각각이 처음엔 너른 천이었을 것인데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남겨진 자투리가 되었다가 이제는 하나로 꿰매져 보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보자기를 우리는 조각보라 부른다.

어떤 조각보는 몇 가지 색을 엇갈려 배치해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몬드리안의 추상미술에 앞서 우리네 할머니가 이어붙인 조각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색색깔 천 자투리를 어떻게 이어붙이냐에 따라 보자기 전체의 인상은 전혀 달라진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상일 뿐 이야기는 아니다. 조각보 그 자체로는 의미나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 색색깔 점의 연결로 인상을 남기는 추상미술이지 유려한 선의 연결로 표현자와 수용자 사이에 통용되는 어떤 의미를 빚어내는 객관미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률 감독의 신작 <춘몽>을 보며 조각보를 떠올렸다. 100분 남짓한 영화에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영화였다면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 장면들이 마치 수년 전 화천 초소에서 올려본 밤하늘별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그 각각이 곱고 예뻐서 주의를 기울여 사연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별 같이 어여뻤던 장면들은 모두 하나의 점으로 남아 선이 되지 못했다. 선이 되지 못했으므로 앞과 뒤가 이어지는 이야기도 되지 못했다.

장률이 바느질한 조각보 위에서 잊힌 서울의 풍경을 보다
영화는 한 여자와 세 남자, 그리고 또 다른 한 여자의 이야기다. 세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한다. 다른 한 여자도 그녀를 좋아한다. 사랑받는 여자는 처음엔 꼭 그런 것 같진 않았지만 점차 그들을 좋아하게 된다. 그들이 서로를 충분히 좋아하게 됐을 때 여자는 떠나고 남자들과 한 여자는 남겨진다. 여자가 왔다 가자 그들의 고향은 제 색깔을 드러낸다.

한국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감독 양익준과 박정범, 윤종빈이 세 남자를 연기한다. 이들은 그들 각자의 영화에서 최소 한 차례씩 시도했던 특유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실명으로 연기한다. 양익준은 <똥파리>의 건달, 박정범은 <무산일기>의 탈북자, 윤종빈은 <용서 받지 못한 자>의 고문관 모습과 얼마 다르지 않은 캐릭터를 입고 장률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섰다. 영화를 위해 캐릭터를 만든 게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가 고스란히 영화를 이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 각자가 자신의 영화에서 쓰고 남은 아이디어처럼 보이는 장면도 곳곳에 있다. 버려진 장롱 속에서 기도하고 나오는 노인, 6개월 치 임금을 체불한 악덕업주의 차를 매일 같이 가로막고 90도로 인사하는 정범, 그 악덕업주를 찾아 돈을 받아내는 친구들, 주점에서 소란을 피우다 장난감 총을 꺼내 보이는 사내, 벽보를 붙이는 그의 형, 동물원 원숭이 우리 앞에서 춤을 추는 송호창 변호사,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갑작스럽게 등장한 신민아와 유연석 등은 영화 속에서도 영화 같이 보이는 장면으로 이벤트처럼 지나간다.

각 장면들은 몽환적인 꿈처럼, 혹은 얼기설기 엮어진 옴니버스 영화처럼 앞과 뒤가 연결되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하다. 일상의 의미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다루는 홍상수의 영화 같기도 하고 짐 자무쉬의 초기작이나 <자객 섭은낭> 같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처럼도 보인다. 이들 가운데 몇은 다루고 있는 이야기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분위기와 인상, 소재 따위의 것들이 중요하다. 나는 <춘몽>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보기에 따라 달리 보이는
영화는 왼편에서 보면 성장드라마이고 오른편에서 보면 스릴러이며 정면에서 보면 이도 저도 아닌 조각보일 뿐이다. 초점을 맞춘 캐릭터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 에피소드에 따라 영화는 성장드라마가 됐다 스릴러가 되고 멜로드라마나 버디무비, 블랙코미디가 되기도 한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두고 고민하는 딸의 이야기로 영화를 보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버지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가르치듯 아버지를 걱정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반면 조금만 달리 보면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탄 휠체어를 밀어 살해하려는 스릴러처럼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또 주인공 여자인 한예리가 추는 세 차례 춤에 집중하면, 만약 그 춤을 자아표현이나 꿈, 혹은 이상으로 본다면, 영화는 이상에 대한 추구가 좌절되는 한 편의 현실적인 드라마가 된다. 영화 속에 춤은 모두 세 차례 등장하는데 하나는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할 때고 둘은 세 남자와 상암동을 찾았을 때며 셋은 예리의 가게에 이상형인 유연석이 들렀을 때다.

이 가운데 한예리가 처음 춤을 추던 장면에서 카메라는 한예리의 시선에서 그녀와 세 남자가 술을 마시던 평상을 비추는데 그곳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두 번째 춤을 추던 장면은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있는' 상암동에서 한예리가 춤을 추면 장면인데 그녀는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따라 춤을 추는 모습을 보자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게를 찾은 유연석 앞에서 '구애의 춤'처럼도 여겨지는 몸짓을 하는데 이번엔 그녀가 스스로 춤을 멈추지 않았음에도 유연석이 가게를 나가버린다.

어쩌면 처음엔 그녀의 세상에 세 남자가 없었고 다음엔 세 남자가 들어왔으나 마음에 들지 않으며 마지막엔 자신이 꿈꾸는 이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모두는 부질없는 해석일 뿐이다. 조각보 위 비슷한 천 조각 몇 개를 이어붙인 것일 뿐이니.

영화는 뼈대가 살아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한바탕 놀이판에 가깝다. 비슷한 문양의 퍼즐 몇 개를 이어붙이면 팡하고 터지는 모바일게임처럼, 영화 곳곳 흩뿌려진 장면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꿰어지는 재미난 놀이판인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화장실 사각 타일에서도 의미 있는 모양을 찾아내곤 한다. 모래밭이나 고구마, 구운 빵에서 예수나 석가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달에서 절구 빻는 토끼를, 지구상 가장 오래된 생명체보다 훨씬 오래 그 자리에 있었을 바위로부터 온갖 동물의 형상을 찾아내곤 하는 것이다. 이건 연상과 상상, 관찰을 통해 의미가 없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해내는 고등생물의 지적 유희다. 그리고 <춘몽>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다양한 지적 유희가 가능한 조각보 같은 영화다.

앞 장면과 뒤 장면, 그렇게 서로 연결될 법한 몇 장면을 꿰면 성장드라마나 범죄극도 되지만 그보다는 친한 영화인들이 모여 한바탕 놀이를 벌인 영화쯤으로 편히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모든 해석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정답이 없어 더욱 매혹적인 것이 영화라는 예술이므로.

비주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영화에선 장률 감독 특유의 비주류에 대한 애정도 엿보인다. 어느 부분에선 그가 주류라고 여기는 대상에 대한 반감도 보이지만 말이다. 일례로 영화에서 그는 양익준의 입을 빌려 낙후된 재개발지구 수색동을 사람냄새 나는 우리 고향이라 말하고 경의선 철길 건너 붙어 있는 상암동에 대해서는 고개 뻣뻣하게 든 기분 나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영화는 도시의 송전탑과 변압시설도 비춘다. 특히 변압시설이 영화의 엔딩 등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도시가 필요로 하는 전기를 도시 밖 발전소로부터 가져오고 이를 위해 대형 변압시설을 도시에 조성해야 한다는 것, 막상 이와 같은 시설은 실제 전기를 많이 쓰는 도심 사람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지역에 지어지게 마련이다. 도시의 세련된 사람들이 주로 등장하는 영화에선 보인 적 없는 이와 같은 시설이 장률 감독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는 건 몹시 의미심장한 일이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운 수색동 풍경. 중국을 떠나온 조선족 여자와 탈북자, 고아원 출신 양아치, 모자란 지능에 간질 발작을 안고 사는 사내, 시 쓰는 레즈비언 여성까지. <춘몽>은 소외된 비주류에 따스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꿈같은 이야기다. 비현실적이고 위태롭게 아름다워서 깨고 나면 펑펑 울고 싶어지는 그런 꿈 말이다.

나는 장률이 바느질한 조각보 위에서 잊힌 오늘의 풍경을 봤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봤다. 예뻤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5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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