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산성과 천년고찰, 트레킹 코스 어우러진 충남 부여 성흥산
신록 우거져 터널을 이룬 쾌적한 숲길, 숲길 따라 이어지는 선인 발자취들, 가볍게 올라 진하게 누리는 탁 트인 전망, 그리고 천년 고찰…. 가정의 달이자 신록의 달인 오월, 어른·아이 함께 즐기는 한적한 가족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 부여 성흥산으로 떠나볼 만하다. 낮지만 골 깊고 이야깃거리도 풍성한 산이다. 백마강·정림사지·부소산성·궁남지 등 백제 유적 즐비한 ‘세계유산 도시’ 부여 읍내의 명소들에 비하면 덜 빛나 보이지만, 덜 알려져 그만큼 한적한 곳이다.
금강 풍광과 평화롭게 어우러져
‘연애 전설’ 사랑나무는 연인들에 인기
독특한 표정의 대조사 미륵불 눈길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0m나 되는 거대한 석불로, 논산 관촉사 미륵불과 쌍벽을 이루는 고려시대 작품(12세기 추정)이다. 4등신에 가까운 몸집으로, 균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후덕하고 인자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미륵보살은 미래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석불 앞에는 역시 돌을 다듬어 만든 대형 제단이 마련돼 있다. 바로 옆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올라 석불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350년 된 소나무도 자태가 아름답다. 오는 5월14일(부처님오신날) 대조사에선 ‘행복 나눔’을 주제로, 국악인들과 대중가수들이 참여하는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현재 임천초등학교와 임천면사무소 자리는 조선시대 임천 관아가 있던 곳이다. 면사무소 옆엔 350년 된 소나무(임천관아터 소나무) 모습이 특이하다. 높이는 4m에 불과하지만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 온몸을 뒤틀며 가지들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임천 관아의 정문이었던 ‘배산루’는 일제강점기에 백마강변 부소산성으로 옮겨진 뒤 ‘사자루’로 현판을 바꿔 달았고, 임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 건물도 해체돼 대조사 경내의 원통보전(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짓는 데 쓰였다고 한다.
이밖에 성흥산 동남쪽 임천면·세도면의 경계를 이룬 덕고개 밑에는 오래된 샘터 등경수가 있다. 물을 마신 뒤 과거시험을 보거나 송사를 다투면 반드시 합격하고 승소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샘물이다. 덕고개 밑 세도면 동사리에는 민간 가옥 형식의 서원 ‘동곡서원’이 있다. 장암면 장하리의 ‘장하리 삼층석탑’(보물 제184호)도 볼만하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본뜬, 4.8m 높이의 우아한 고려 초기 석탑이다.
부여/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400년 할아버지 나무 ‘사랑나무’로 인기 “사랑나무 보러요.” “사랑나무 나름 유명해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260m) 중턱, 성흥산성(가림성) 밑 주차장. 20대 남녀도, 어린이를 동반한 30·40대 가족도, 50·60대 아주머니들도 당연하다는 듯 한목소리로 말했다.
‘사랑나무’는 성흥산성 남문 터 위에 솟은 400년 넘은 느티나무를 가리킨다. 이 할아버지 나무에 ‘사랑나무’란 이름이 붙은 건, 나무 한쪽으로 부드럽게 꼬여 퍼져나간 가지 하나가 나무 몸체와 어우러져 커다란 ‘하트’ 모양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완벽한 하트는 아니어도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다. 연인이 함께 찾아와 나무를 돌며 기원하면 ‘영원한 사랑을 이룬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기원하고 구경하고 사진 찍으려는 젊은 남녀의 발길이 이어진다. 날씨 좋은 날이면 저물기를 기다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하트 모양 안에서 사진을 찍는 이도 많다.
높이 20m, 몸통 둘레 5m에 이르는 이 거목은 하트 모양이 아니더라도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가지는 고루 넓게 퍼져 쉬기 좋은 큰 그늘을 이루고, 거대한 뿌리는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흙을 단단히 움켜쥔 모습이다. 주변이 시원하게 트인 성벽 위 평지 한쪽에 우뚝 솟은 까닭에,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주변 마을과 산줄기들이 어우러져 매혹적인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멀리 금강 물줄기 너머 논산 강경 일대도 눈에 들어온다. 드라마 <서동요> <여인의 향기> 촬영지이기도 하다.
성흥산 자락에서 19년을 살았다는 주차장 옆 매점 여주인은 “원래 가지가 엄청나게 우거져 훨씬 보기 좋았는데, 태풍이나 큰눈 올 때마다 가지가 부러져나가 지금처럼 됐다”고 했다. 사랑나무 옆은 꽤 널찍한 평지여서 아이들이 놀고 쉬기 좋다.
사비성 지키던 요충지 성흥산성
금강 풍광과 평화롭게 어우러져
‘연애 전설’ 사랑나무는 연인들에 인기
독특한 표정의 대조사 미륵불 눈길
성흥산성·대조사 거치는 ‘솔바람길’도 조성 성흥산성은, 백제시대 산성으로는 드물게 축조 시기가 기록으로 전해온다. 서기 501년(동성왕 23년)에 사비성을 지키려고 금강 하류 요충지에 가림성을 쌓았다고 한다.(<삼국사기>) 둘레 약 1.3㎞의 이 테뫼식(산 중턱쯤을 한 바퀴 휘돌아 성을 쌓는 방식) 석성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로 활용됐던 곳이다. 해마다 4월, 이곳에서 희생된 백제 무명 장졸들을 추모하는 충혼제가 열린다. 성안에선 창고터 등 건물터와 우물 3곳이 확인됐는데, 동쪽 산자락의 우물은 지금도 식수로 이용된다.
사랑나무에서 우물 지나 정상 쪽으로 잠시 오르면, 고려 초기에 활약했던 유금필 장군 사당이 나온다. 유금필은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일 때 이곳에 들러 주변 고을의 빈민 구제활동을 폈던 인물이라고 한다. 팔각정인 성흥루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산 정상이다. 정상에선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흥산 중턱까지는 좁은 아스팔트 도로가 만들어져 있어 차로 오를 수 있다. 성곽 남문 밑에 주차장과 매점·화장실이 있다. 주차장에서 남문터 사랑나무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다.
성흥산엔 솔바람길 등 트레킹 코스가 마련돼 있어 걸어볼 만하다. 솔바람길은 산 동남쪽 덕고개에서 성흥산성 거쳐 북동쪽 학고개에 이르는 4.6㎞ 길이의 탐방로다. 임천면사무소에 차를 대고 걸어올라 대조사와 산성을 둘러보고 내려와도 좋다. 주차장 쪽으로 오르다 옆길로 빠져 대조사를 둘러본 뒤 산성에 올랐다가,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대나무숲 거쳐 면사무소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도 있다. 이 코스는 내리막이 다소 가파르다.
대조사에서 부처님오신날 산사음악회 성흥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백제 때 고찰 대조사다. 6세기 초에 창건된 절로, 당우(건물)들은 대개 최근에 지은 것들이지만 대웅전 뒷산의 고려 때 만들어진 대형 미륵석불(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대웅전 앞 삼층석탑이 옛 절의 면모를 보여준다. 한 노승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바위 위에 커다란 새가 앉는 것을 보고 깨어나 보니, 바위가 미륵불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대조사(大鳥寺)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성흥산 자락 대조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임천면사무소 옆 350살 난 ‘임천관아터 소나무’.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장암면 장하리의 삼층석탑(보물).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세도면 동사리 동곡서원 안채의 낡고 닳은 툇마루.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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