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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화가 - 서경식

by 오직~ 2016. 3. 3.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31040.html

 

 

 

이중섭은 ‘난민 화가’다. 모든 걸 잃고 ‘난민’이 되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선가. 지금도 전세계에 ‘난민’이 넘쳐난다. 그중에 이중섭과 같은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중섭을 애석하게 여길 수 있는 이들이라면 그 무수한 사람들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화가 이중섭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이(E)텔레비전은 ‘일요 미술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중섭 특집을 내보냈는데, 나도 논평자로 출연했다(2016년 1월24일 방영).

 

나는 2014년에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상재했는데, 거기 이쾌대를 논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일본에 유학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뒤 한국전쟁이 나자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고, 피난생활 끝에 가족과도 헤어진 채 미쳐 죽은 이중섭. 해방 뒤 남쪽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화가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던 일본 생활을 버리고 북쪽 땅으로 돌아가 소식이 끊긴 조양규. 한국전쟁 때 북의 인민군에 가담했다가 부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뒤 포로교환 때 북행길을 택한 이쾌대. 이들 세 사람은 각기 뛰어난 재능을 지닌 화가였으나 각자의 행로는 이토록 극단적으로 갈렸다. 해방 이후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중섭, 조양규, 이쾌대 세 사람의 작품을 한 전시장에 모아 관전할 수 있는 전람회를 열어본 적조차 없다. 이들 세 화가가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자마자 분단으로 전락해간 그 시대, ‘해방공간’이라 불리던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갔던가, 그것을 어떻게 자신들의 예술에 투영했던가, 엇갈리는 각각의 궤적을 서로 대조해가며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 미술’의 콘텍스트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것은 내가 풀어야 할 ‘무거운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중섭은 남쪽에서는 ‘국민적 화가’로 불릴 정도로 대단히 유명하지만, 나처럼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그렇게 친숙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새삼 이중섭에게 관심을 갖게 돼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그의 옛집에도 가 봤다. 글자 그대로 고양이 낯짝만한 작은 방밖에 없었다. 그는 거기서 일가 4명이 먹는둥 마는둥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고독사한 그의 유골이 매장된 서울 망우리 묘지에도 가 봤다. 평론가 최열씨가 이렇게 썼다. “춥고 배고픔에 지쳐 죽어간 이중섭은, 너무도 안타까워 이렇게 살아 있는 내가 죄스러울 지경이다.”(‘황폐한 세기의 격정’, <화전>) 나 개인의 소회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애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민족의 운명 그것처럼, 애절하다.

 

조선 근대미술가들은 일부를 빼고는 일본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오랜 세월 근대미술을 보거나 논할 때 ‘일국적인 틀’이 선행돼왔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야 그런 닫힌 미술관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는 전시회가 일본에서 열렸다. 하나는 2014년의 ‘도쿄·서울·타이베이·창춘-관전(官展)으로 보는 근대미술’이고, 또 하나는 2015년의 ‘재회, 한일 근대미술가의 시선-<조선>에서 그리다’이다. 비판이나 주문이 없지 않았지만 꽤 충실한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자에서는 조양규, 이쾌대와 함께 이중섭의 작품도 전시됐다.

 

일본에서 조선 근대미술가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조선민족 쪽에 있다.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이미 70년이 넘었다. 식민지시대의 2배나 된다. 이 너무 긴 분단은 미술사 이해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이쾌대전이 열렸으나 조양규는 본격적인 개인전이 아직 열린 적이 없다. 북쪽 사람들이 이중섭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남쪽 사람들이 얼마나 조양규를 알고 있을까?

 

그의 대표작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남북 동포와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한자리에 모이는 전시회조차 열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해방공간에서 엇갈린 이들 화가 세 사람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가 국내에서는 아직 열린 적이 없다. 이래서는 식민지 시기, 해방공간, 분단시대를 관통하는 자신들의 미술사 상(像)을 그려 볼 수 없을 것이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이들 세 사람의 작품 동시 전시회가 일본 <재회>전에서 선행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기뻐함과 동시에 서울과 평양에서 이런 전시회를 열 수 없는 현실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의 부유한 지주 가정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산고교에 다니다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공부했다. 루오의 영향을 받았으며, 보들레르와 릴케의 시를 즐겨 암송했다. 졸업 뒤 조선으로 돌아간 이중섭은 해방 3개월 전인 1945년 5월, 그를 따라 조선으로 간 문화학원의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해 원산에 둥지를 틀었다. 전쟁이 나자 이중섭은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가 또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했다. 생활은 더없이 곤궁했으나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나갔다. 그림도구를 살 여력조차 없었던 그는 담배 포장 은박지에 태양과 바다, 게, 신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을 그렸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그는, 영양실조와 결핵 때문에 고생하는 처를 일본의 처가로 돌려보냈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벗 등의 도움으로 각지를 전전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 1955년 1월에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 직후부터 정신병을 앓아 건강을 크게 해친 끝에 1956년 9월6일,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최후는 고흐나 모딜리아니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점은 거기에 식민지배, 민족분단,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 처와의 이별도 그런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마사코 부인은 지금도 건강해서 이번 ‘일요 미술관’에도 출연했다.

 

이중섭은 소를 많이 그렸다. 일제시대 일본에 유학했던 조선인 미술학도들이 ‘백우(白牛)회’라는 그룹을 결성한 적이 있다(1933년). ‘백’의 흰색도, ‘소’도 민족적인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라를 잃고 고향이나 가족과도 헤어져 있지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자그마한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그룹 이름을 일본 당국이 문제삼자 결국 ‘재동경미술협회’라는 이름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뒤 마침내 마음껏 ‘소’를 그릴 수 있는 상황이 돌아왔다. 분단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화가는 ‘소’를 계속 그렸을 것이고 가족과도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중섭은 말하자면 ‘난민 화가’다. 모든 걸 잃고 ‘난민’이 되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선가. 애초에 인간이란 존재에게 예술이라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문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존재가 이중섭이다. ‘난민’이 된 화가가 극도의 빈궁 속에서 담배 포장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 그린 그림. 얼마나 보잘것없고 초라한가. 하지만 그 세계는 친밀하고 에로스로 가득차고 유머도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렴풋이 광기를 띤 구극의 유토피아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 떠오른다.

 

처자와 함께 일본에서 살았다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얘기하는 이도 있다. 정말 그럴까? 주운 은박지에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것이었다. 가혹한 상황일수록 그리는 것이 그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살아가서는 채워지지 않는 예술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 화가의 독자성과 보편성이 있다.

 

지금도 전 세계에 ‘난민’이 넘쳐난다. 국가의 보호에서 배제당한 채 오직 생존을 위해 들판을 맨발로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 그 중에 이중섭과 같은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중섭을 애석하게 여길 수 있는 이들이라면 그 무수한 사람들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