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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아름다움 - 김종철

by 오직~ 2015. 6. 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4280.html

 

 

 

 

“지금 세계에 환경위기는 없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통치(정치)의 위기입니다.”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의 발언이다. 기후변화나 환경위기는 기술적 대응이나 ‘환경운동’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공공의 정신에 충실한 정치질서가 확보될 때 비로소 해결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지구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최대 현안은, 말할 것도 없이, 기후변화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의 예견으로는 이대로 간다면 이번 세기말에는 지구상에 살아남아 있을 인간이 별로 없다. 이런 예견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해도, 조만간 급진적인 변화가 없다면 인류의 평화로운 생존·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파국적인 상황이 연쇄적으로 닥칠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거대 석유회사들의 경영진도 보다 청정한 에너지원 개발과 ‘탄소세’ 도입 등에 대한 지지를 언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공식적인 발언과 실제 행동 사이에 드러나는 괴리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 석유기업 ‘로열더치셸’은 내부적으로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4°C까지 상정해놓고 있음이 최근 언론보도로 알려졌다. 이것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폭이 반드시 2°C 이내로 멈춰져야 하고, 따라서 화석연료 소비량이 극적으로 축소돼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지견을 완전히 무시한 수치이다. 석유회사에 의한 이러한 ‘과학’ 무시 자세는 결국 단기적인 사적 이익이 늘 장기적인 공적 이익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자본’의 논리 때문이다.

 

석유재벌 ‘셸’의 자세는 예외적인 게 아니다. 우리는 흔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경영을 운위하지만, 사실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은 세상이 곧 망한다 할지라도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는 뭣이든 못 할 게 없는 구조와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기업 경영자가 설사 윤리적 경영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게 주가 상승에 방해된다면 주주들이 용인할 리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궁극적인 책임을 ‘국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존립 명분이 어디까지나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명분에 국가가 얼마나 충실한지를 따지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 국가는 오늘날 얼마나 자본의 폭주에 적절히 제동을 걸고,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가?

 

그러나 국가는 공적 책임을 거의 완전히 방기하고 사실상 자본가들의 하수인,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국가의 이런 무책임한 자세를 엄격히 추궁해야 할 언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언론은, 큰 언론사일수록, 그 자신이 하나의 기업조직이 되어, 공공의 정신을 상실한 ‘사이비’ 언론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난 2월까지 재직했던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의 발언이다. 무히카는 오늘날의 정치지도자로서는 드물게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사심 없이 공직 수행을 해왔고, 우루과이 시민들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큰 지지와 존경을 받아온 희귀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임기 말에 어떤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매우 중요한 말을 남겼다. 2012년 유엔총회에서 행한 ‘역사적’ 연설에서도 드러났듯이 무히카 대통령은 평소에 기후변화를 위시한 환경위기에 남달리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온 정치가이다. 그런 그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지금 세계에 환경위기는 없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통치(정치)의 위기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역설적인’ 발언은 실은 문제의 핵심을 명료히 적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기후변화나 환경위기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기술적 대응이나 ‘환경운동’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와 국가운영이 합리적으로 작동할 때, 다시 말하여 공공의 정신에 충실한 정치질서가 확보될 때만이 비로소 해결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리적인 정치, 정상적인 국가운영이란 결국 사회적 약자들의 능동적인 정치참여가 보장된 시스템, 즉 민주주의 말고는 확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히카가 말하는 ‘통치의 위기’란 실은 지금 세계적으로 민주정치가 실종된 현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유럽의 정치도 지금은 ‘엘리트들의 스포츠’(<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6월호 표제)로 전락해버렸다.)

 

사실, 기후변화나 환경위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환경문제 못지않게 시급한 대응을 요하는 빈곤, 실업, 출산율 저하, 중산층 몰락, 심화하는 부의 집중화 등 사회적 삶의 기반을 위협하는 온갖 사회경제적 문제들도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의 쇠퇴 혹은 결여에 기인한, 합리적 국가운영의 실패 혹은 정치다운 정치의 실종에 따른 어김없는 결과임을 우리는 확실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극소수 특권층에 집중된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고르게 배분하고, ‘국가’가 소수 특권층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익 실현에 복무하는 공기(公器)가 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 사회의 혼란과 고통의 으뜸 요인은 과도한 사회적 양극화, 경제적 불평등이다. 원래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귀속된 ‘공유재’를 소수 권력층이나 부유층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대다수 민중은 빈민으로 전락하여 사실상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심화될 때 세상은 안정과 평화를 잃고 혼돈 상태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회는 극심한 분열, 갈등으로 결국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사회들은 적절한 ‘개혁’을 통하여 혼돈 상황을 타개하는 지혜를 발휘해왔다. 그런 지혜로움을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은 스스로의 기획과 의지로써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은, ‘좋은 사회’를 인간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은 원래 고대 아테네의 시인이자 개혁정치가였던 솔론이 인류 사회에 남겨준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기원전 6세기 아티카 사회는 올리브유 등 활발한 무역으로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했으나 부유층에 의한 경제적·정치적 권력 독점으로 극심한 양극화, 계층 간의 반목과 갈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다수 농민과 빈민은 빚에 짓눌려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고, 빚 때문에 해외로 도피하는 탈주자도 부지기수였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머잖아 사회적 기반 자체가 붕괴될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결국 부유층과 평민들은 솔론을 집정관(아르콘)으로 추대하는 데 합의하여 그에게 ‘독재권’을 부여했다. 솔론이 추대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뛰어난 시인으로서 당대 현실을 가장 아파하고 그것을 절실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이오니아인들의 오래된 땅이 지금 갈기갈기 찢기고 있구나. 아아,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나는 느낀다”는 그의 절규가 사람들의 큰 공명을 얻었던 것이다.

 

솔론은 무엇보다 부채를 청산하고 토지를 조정·분배하는 것에서 개혁을 시작했다. 그 때문에 부유층의 극심한 반발을 샀으나 그는 부유층의 도덕적 퇴폐를 공격하고, 경자유전의 논리를 내세워 과감하게 토지개혁을 실천했다. 그는 빈민들에게 아첨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는 덕(德)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솔론은 평민들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제도(평의회)를 만들고, 제비뽑기에 의한 공직자 선출이라는 제도를 최초로 도입함으로써 아테네 민주주의의 초석을 깔았다.

 
비록 2600년 전의 이야기지만, 솔론의 개혁은 지금 우리에게도 가르쳐주는 바가 많다. 근원적으로는 그 시대나 지금이나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공유재’의 고른 분배, 그리고 평민의 능동적 정치참여가 핵심인 것이다. 이것은 ‘좋은 사회’ 성립의 불가결한 토대이며, 절망적 상황을 희망적 현실로 바꿔놓는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