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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길

수암골이 활짝 피었어요 _ 충북 청주

by 오직~ 2009. 6. 6.

 

 

 

청주 수암골과 중앙공원
충북 청주시청 옆에서 수암골 지나 중앙공원까지 4km

 

» 청주민예총의 작업으로 수암골이 그림같은 동네로 탈바꿈했다. 민예총은 해마다 주민·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공연·전시·체험행사를 수암골에서 열어 공동체 문화의 새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중부 내륙의 고도 충북 청주. 마한 시절부터 영토 다툼이 치열했던 격전지이자, 중세 인쇄문화의 요람이다. 걷기엔 먼 거리인 상당산성과 고인쇄박물관, 도심을 관통하는 무심천을 제쳐두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낡고 닳은 골목들과 생생한 유적들이 나그네 발길을 끌어당긴다. 청주시청 부근 상당로 충북농협본부①에서 시작한다.

 

금요일이라 농협 뒤뜰에선 농산물 장터가 열렸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점심 무렵까지 ‘반짝 시장’이 마련된다. 청주 주변 농가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기르고 채취한 것들을 이고 지고 나와 좌판을 펼치는 모습이 정겹다. 방아다리 네거리에서 대성여상 쪽으로 걷는다. 무심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천을 복개한 도로다. 네거리 부근에 개천을 건너다니던 방아다리가 있었고, 다리 옆엔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 골목 세 블록 너머엔 1980년대 청주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수동성당②이 있다.

 

» 삼일공원 우암산 산책로 들머리.

80년대 민주화운동 성지 수동성당

영암슈퍼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오르면 곧 표충사③ 정문이 나온다. 조선시대 당파싸움 폐해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사당이다. 영조 4년(1728년), 영조와 집권 노론세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무신란(이인좌의 난; 양반·군인·상인·농민이 참여한 봉기) 때, 반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 등 3인의 위패를 모셨다. 표충사 돌담을 끼고 오르면 비탈 쪽으로 달동네 골목이 펼쳐진다. 우암산 기슭 수암골④이다. 50~70년대 골목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마을에 하나뿐인 가게 삼충상회⑤가 골목길 탐방 출발점이다. 36년째 가게 주인이자 ‘가로수 정비’ 전문가이며 수암골 노인회장인 박만영(73)씨가 말했다. “시방 여기 주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여. 70여호에 153세대밖에 안 뒤야. 죄 늙은 내우(내외)만 사는 집덜이구.”


30분쯤 골목을 기웃거리면 동네 그림이 그려진다. 닫힌 듯 열린 녹슨 철대문, 쓰러질 듯 기대선 담벽들과 거기 대문짝만하게 적힌 ‘근면·자조·협동’ 표어 따위들이 옛 풍경화 속으로 끌어당긴다. 산비탈로 촘촘히 손수건만한 지붕을 쓴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를 겨우 비집고 나간 골목길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길들은 어떻게든 서로 만난다. 길 잃을 염려는 없다.

 

광복 뒤 중국·일본에서 들어온 동포들이 터를 잡은 곳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몰려든 피란민들을 우암산 자락으로 이주시키며 산동네가 형성됐다. 수암골에 산 지 40년 돼간다는 최인덕(75)씨는 “옛날엔 화장실 없는 집이 많아 코딱지만한 간이 공동변소들을 텃밭 옆에 지어놓고 썼다”고 말했다.

» 수암골 골목 한쪽에 놓인 요강.

“낡고 드럽고 니야까도 제우 올라왔던” 골목들은 지난해 환하게 바뀌었다. 청주 예술인들의 애정과 솜씨 덕이다. 청주민예총이 수암골 환경 가꾸기에 나섰다. 떼 지어 붓을 들고 몰려와 금 간 담벽이고 대문이고 전봇대고 쓰레기통이고 버려진 화분이고를 가리지 않고, 들입다 그림 그리고 색칠했다고 한다. 순식간에 동네 전체가 살아 있는 작품으로 태어났다.

 

수암골은 지난봄 티브이 드라마 ‘카인과 아벨’을 통해 알려지면서 방문객이 늘고 있다. 민예총은 지난 5월에도 수암골에서 ‘골목길 광장을 품다’라는 주제로 각종 공연·전시·체험행사를 진행했다. 골목엔 5년 전 민가를 개조해 들어앉은 작은 암자 혜원정사⑥(주지 정은 스님)가 있다. 볼일이 급하거나 목마른 탐방객들에게 암자를 개방한다.

 

마을을 한 바퀴 더 돌고 내려와 소방도로 따라 오른다. 주차장 옆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 좁은 찻길을 걸으면 청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청소년 문화의 집’ 지나 벚나무 가로수 우거진 우암산 순환로로 올라선다. 삼일공원⑦으로 가는 숲길이 울창하다. 우암산(353m) 등산로 들머리 중 한 곳이다. 3·1 독립선언 33인 중엔 충북 출신이 6명인데 이 중 5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공원에 간이매점·화장실이 있다. 공원에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에 2층짜리 조각전시장 겸 카페 브룩스를 만난다. 2층 옥상에서 차를 마시며 시내를 둘러볼 만하다. 커피 5천원.

 

내려와 곧장 걸어 중앙시장 앞 네거리를 건넌다. 중앙시장통을 지나면 왼쪽으로 차 없는 거리가 시작된다. 들머리는 한때 헌책방이 열세 곳에 이르렀다는 옛 헌책방 거리다. 40년 된 헌책방 세 곳이 남아 있다. 청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를 찍은, 고인쇄문화의 요람이다. 길바닥에서도 거리 펼침막에서도 쉽게 ‘직지’(直指)라는 글씨를 만날 수 있다.

활기 넘치는 패션가를 지나 성안길로 든다. 북문을 통해 청주읍성 안으로 들던 지점이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점령했던 것을 관군과 의병이 치열한 전투 끝에 탈환하면서 전국에 왜적 퇴치의 자신감을 심어줬던 곳이다. 길옆에 ‘북문터’임을 알리는 빗돌⑧이 있다. 청주읍성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은 일제 초기까지 존재했다. 일제는 성문과 성곽을 헐어 하수구 축대 쌓는 데 쓰고, 성곽터를 따라 길을 냈다.

 

» 서 있은 지 천년이 넘었다. 청주 도심 한가운데 우뚝한 용두사터 철당간(국보 41호).

금융거리 지나고 백화점거리를 지난다. 젊고 새롭고 화려한 것들이 넘치는 거리 한편에 놀랍게도, 낡고 닳은 유물 하나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다. 영프라자 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국보 41호 용두사터 철당간⑨이다. 당간은 절 들머리에 세우고 깃발을 달아 법회 등을 알리던 일종의 깃대다. 절터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이곳에 높이 12.7m(본디 20m)의 철당간만 남았다. 당간엔 건립 연대인 ‘준풍 3년’(고려 광종 13년·서기 962년) 등 393자의 명문이 돋을새김돼 있다.

 

은행나무 나이가 900살

돌아나와 길 건너 중앙공원 쪽 먹자골목으로 간다. 우동집·호떡집·떡볶이집 등 오래된 집들이 포진한 골목이다. 중앙공원으로 들어서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울창한 숲과 함께 즐비한 비석들에 놀란다. 청주성 탈환의 선봉장 조헌·영규대사 추모비 등 공원엔 50여개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어 ‘비림(碑林)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충청병영의 정문이던 충청병마절도사영문⑩과 동헌의 뒤쪽에 있던 것을 옮겨온 아름다운 누각 망선루⑪의 위용을 만날 수 있다. 고려말 이성계에 반대해 감옥에 갇혔던 목은 이색 등이 대홍수 때 나무에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는, 900살 먹은 은행나무 ‘압각수’도 볼거리다. 중앙공원 문을 나서면 남사로와 남주로가 만나는 지점, 옛 읍성의 남서쪽 모서리 부근이다. 여기까지 4㎞ 남짓 걸었다.

 

 

» 지도 그래픽 디자인 멋짓

워킹 쪽지

중부고속도로 서청주 나들목에서 나가 흥덕로를 따라 청주 시내로 가거나,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으로 나가 36번 국도를 타고 직진해 사직로를 따라 간다. 청주대교 건너 상당사거리에서 좌회전해 5분쯤 가면 왼쪽에 청주시청이 있다.

3대째 빵·우동을 함께 팔아온 서문우동(서문제과·043-256-3334)과 돈가스·우동을 함께 파는 공원당(043-255-3894)은 청주 우동의 양대 명가다. 남주동해장국집(043-256-8575)은 65년간 남주시장 어귀에서 선지해장국을 말아온 집. 서문오거리 부근 골목엔 올갱이(다슬기)국 전문식당이 두 집 있다. 상주할머니집(043-256-7928), 미원식당(043-256-1617).

 

한겨레

청주=글·사진 이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