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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변명은 슬프다

by 오직~ 2009. 1. 18.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무욕의 정신이여

(슬픈 힘)

 

 

 

눈이 온다

..

어두운 열정이 그윽한 향기가 되는 일,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살 일이다

이전에도 내렸고 이후에도 내릴 눈

(산사)

 

 

 

고통은 옛 자취를 따르지 않고

숲은 걸으면 다 길이 된다

길을 잃어도 숲은 스스로 제 갈 길 찾도록

그저 기다리고만 있으니

..

찰나적인 모든 것들이 완벽한 질량으로 들어 차 있는

산은 통째로 길인 것을,

먼 길 걸어와 잠시 쉬어보는 자리도

때로는 벅찬 미로일 것이나

(깨어 있는 시간)

 

 

 

북으로 부는 바람 속에서 홀로

비인 들판을 지키는 일은 행복하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 헤어져 가버린 후

가끔 소낙비 퍼붓고 남모르는 씨앗도

되었다가 허공 중에 놓였다가

문득 다 버리고 나면 비로소 열리는 슬픔

참으로 소중한 것은 비우는 것 속에 있으니

스스로 숨기지 않고 늦도록 울어도 목메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어

너를 잊는 일은 차라리 행복하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허수아비 전문)

 

 

 

아무 생각도 없는데 목책 너머엔

벌써 꽃이 피고 있다

밤길에 그림자 고이듯

보이지 않는 그대의 길을 따라

오늘은 내가 간다

그대가 보지 않은 것

듣지 못한 것까지

보고 들으려 하면서

그러나 굳이 애쓰지는 않으면서

다만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걸어가는 일

숲속에선 볼 수 없는 능선을 보기 위해

바람에 차이고 모진 바위를 건너 오르는 동안

고통이 바로 즐거움인 것을

기쁨이 또한 절망인 줄을

스스로 깨닫기도 하였었다

 

제 상처를 어루어 꿈이 되는 길

허나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너는 있다

(등산 전문)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멈추어 선 곳,

그곳이 바로 중심인 것을

아픔과 부끄러움이 곧 힘이고 길이었던 것을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에 이르다)

 

 

 

허공의 솟대 위엔 빈 들판이 펄럭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너는 완벽하게 멀다

(가을 끝에서)

 

 

 

 

 ☆ 변명은 슬프다

   - 권경인-

 

 

 '가지 많은 은유'로 읽기 쉽지 않았던 시집

이 시집을 만든 나이에도(40즈음?) 思春期 시인의 마음!

시인의 삶은 평생이 사춘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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