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꿈이여 / 김영민

by 오직~ 2008. 8. 30.

 
돌아갈 수 없는 그때, 그 꿈이여
» 임순례 <와이키키 브라더스>: 세속이란 무엇인가?

임순례 <와이키키 브라더스>: 세속이란 무엇인가?

1. 악의로써 세속을 정의하는 방식은 일상을 놓치는 약점에 빠집니다. <배트맨>처럼 악을 과장해서 얻는 이분법은 손쉬운 설명이지만 흔히 영웅주의적으로 흘러 되레 세속을 놓칩니다. 그러므로 척마(尺魔)의 위용(威容)이 아니라 오히려 촌선(寸善)의 졸루(拙陋) 속에서 세속의 본질을 찾는 게 현명하지요. 그런 점에서 친구(브라더스)라는 그 흔한 관계는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척마가 아니라 촌선이듯이, 문제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오직 호의만으로 가능해지는 상처와 타락의 지경을 친구처럼 보편적으로 증명하는 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보와 성숙의 문제에 관한 한, 친구라는 것은 아직 영영 관념론일 뿐입니다. 2. 나는 호의의 관념론에 묶이지 않고 세속을 현명하게 뚫어내는 관계론적 처방으로 ‘동무’라는 개념을 10여년 실험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친구’라는 세속의 알리바이가 아니랍니다.(sophy.pe.kr) 



» 임순례 <와이키키 브라더스>: 세속이란 무엇인가?
어제의 꿈과 희망은 오늘의 체계 앞에서 어떻게 사라지는가. 영화는 추억과 선의로 뭉친 친구들을 중심으로 세속(이곳)과 와이키키(저곳) 사이의 거리를 우울하지만 섬세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조명한다. 그러나 친구라는 관계가 세속의 구원이 될 수 없듯 브라더스의 세상 속 어디에도 와이키키는 없다.

건강보신주의는 사종교(私宗敎)처럼 강고하다. ‘웰빙’은 마치 이 시대의 복음인 듯 전파된다. 비만아들은 전방위적으로 솟아오른다. 불과 몇십 년 전만 떠올려 보아도 지금의 물질적 풍족은 과연 상상을 초월하는 종류와 규모의 것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 속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맘껏 구가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결같이 피로하다. 만성적인 ‘피로’ 속에서 자본제적 삶의 증상을 읽어내는 사회학자들이 여럿 있듯이, 우리 모두는 강박적인 풍요에 몰두하면서도 돌이킬 수 없이 피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현대 사회 속의 위험이 ‘체계적’(system-oriented)이라면, 그 피로 역시 체계적인 것이다.

 

생활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뒤엉켜 들어가는 당대의 세속도 체계와 무관할 리 없다. 손쉽게 대별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데는 공동체적 세속이 아니라 체계적 세속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피로의 성격이 체계적이라는 지적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세속의 체계적 속성은 중층다면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는 속성은, ‘(체계적) 피로’라는 테마에서 잘 드러나듯이 세속은 속인들이 체계와 스치거나 부딪치면서 돌이킬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실존적 마모의 현장이자 그 표상이라는 점이다. 세속의 때[世塵]는 시간처럼 공평한 것일까? 마치 마루에 먼지가 쌓이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듯 세속적 체계 속의 삶은 도덕적 부식과 실존적 감가(減價)를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임순례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하고 싶었던 진짜 얘기는 우리가 10대에 가지고 있었던 삶의 원형과 희망이 우리가 30대 중반의 어른이 되었을 때 소시민적 가치관에 묻혀 살면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한탄”이라고 말했다. 어느 평론가는 이를 두고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던 시절의 꿈과 희망이 허약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마모’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번역한다. 어쩌면 전혀 새로운 지적이 아니기에 오히려 절절한 지적이 되는 것일까.

 

꿈은 문턱에서부터 식고, 애인들은 기대보다 빠르게 늙고, 우리들의 존재는 채 성숙하기도 전에 마모된다. 바로 그 세속의 내실에서는, 선하든 강하든, 그 숱한 의도들이 현실 속으로 외출하지 못한 채 실그러지거나 이운다. 그저 ‘일상의 평균치’(Durchschnittlichkeit, 하이데거)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속인들은, 평균치라는 바로 그 소박한 겨냥 탓에 오히려 나날이 평균 이하로 떨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세속이다.


세속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의도가 체계 속에 얽히고 마모되면서 돌이킬 수 없이 어리석게 퇴락해가는 관계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의도는 처음부터 체계와 연루했고, 마지막까지 관계와 내통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역설적인 미덕은 바로 그 세속(이곳)과 ‘와이키키’(저곳) 사이의 거리를 우울하지만 섬세하게, 그리고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조명한 데 있다. 연인도 그렇지 못한 터에 친구라는 그 고래의 관계는 세속의 구원이 될 수 있는가? 그 친구들(브라더스)은 와이키키로 갈 수 있었는가? 아니, 그들은 제 나름의 어리석은 열정 속에서 고스란히 세속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워낙 임순례는 친구들이 와이키키로 갔는지를 물으려는 게 아니다. 이창동의 <오아시스>(2002)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칼리토>(1993)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와이키키로 가지 못한다. 돌아갈 수 없는 그때와 그 꿈은 성우(이얼)의 회상 속에서 안타깝게 반복되고, 해변을 달리던 그 젊은 날의 나신(裸身)들처럼 외려 세속에 대한 무지 탓으로 더욱 해맑아 보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브라더스는 와이키키라는 이름과 추억, 상처와 꿈을 인각한 채로 내남없이 세속 속으로 몰각해간다. 소금 뿌린 배추처럼, 식초 먹은 버섯처럼 그들 모두의 퇴락은 돌이킬 수 없다. 개성화된 실내의 환상이 시장 자본제의 저편이 아닌 것처럼, 추억과 선의로 결연한 ‘친구’(브라더스)도 세속의 저편이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친구라는 그 호의의 관계만큼 세속의 구조적 체질을 정확히 증거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거래하는 타인이 세속이고, 증여하는 애인이 세속이고, 헌신하는 부모가 세속이듯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세속일 뿐인 것!

 

브라더스의 세상 속에서는 그 어디에도 와이키키가 없지만, 고향 수안보 역시 그 누구의 와이키키도 되지 못한다. 성우의 사춘기 우상으로서 ‘아버지의 법’(Loi du pere)을 넘어가도록 도왔던 음악학원 원장은 출장밴드로 근근이 연명하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있고, 남편과 사별한 첫사랑 인희(오지혜)는 채소 트럭을 모는 억척 아줌마로 변신해 성우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애잔함으로 몰아넣고, 현구(오광록)와 강수(황정민)는 본의 아니게 밴드생활을 접고 낙향하고, 고향의 친구들은 각자의 처지와 노릇 속에서 서로 힘들게 버성기며 세속에 복무하고, 끝까지 기타를 놓지 않는 성우도 결국 단란주점에 불려가 발가벗은 채 기타를 연주하는 꼴을 보이고 만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와이키키라는 환상의 진지(陣地)를 중심으로 결속했던 브라더스의 ‘공동체’가 세속의 ‘체계’에 의해 변질되고 와해되어 마침내 물화(物化)에 이르는 모습을 쓸쓸하게 보여준다. 추억은 언제나 공동체의 모습을 띤 채 동일화의 환상을 부추기지만 현실은 에누리 없는 상품의 체계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2008)의 유명한 대사처럼, 우리 모두는 “일찍 죽어 영웅이 되거나 오래 살아서 악한이 되는 것”이라는 과장된 이분법 속에 속절없이 빠진다.


 
임순례의 시선은 따스하게 전해지지만, 영화의 결말에서도 희망의 조짐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서비스는 인희였고 더 이상의 서비스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임순례의 시선과 취지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생각’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게 옳다. 그 어떤 희망도 진보도 생각 속에는 없는 것! 다시 아도르노의 시각을 빌려 물어보자면, 임순례의 시선은 세속에 대항해서 내세운 알리바이일까, 아니면 바로 그것 자체가 세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세속의 일부일 뿐인 것을 세속의 알리바이인 양 제시하는 인문학적 분석과 예술적 묘사는 왜 아직 아무것도 아닐까?

 

김영민 철학자

20080830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