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침묵 속에서 ‘나라’를 지키다
1. 옛날 얘기지만, 32개월의 내 군 생활에는 그 길이만큼 모욕적인 체험들이 많았지요. 주로 직업군인들과의 불화였습니다. 나 역시 10년 이상 ‘군대꿈’을 꾸면서 태정과 승영과 지훈의 증상을 강박적으로 반복하였지요. 하지만, 오익재·신백호·이호룡 등등,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인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도 군대였는데, 놀랍게도 이 선임병들은 태정도 승영도 지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침묵의 힘 속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2. 윤종빈의 사과문으로 국방부는 ‘용서’한다며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든 감독이 ‘용서받은 자’가 된 셈이지만, 엉뚱하게도 가해자들이 베푸는 값싼 용서는 가장 오래된 도착(倒錯)이지요. 3. 우리 옛 시조 중에 “입실(入室)을 못한 전에 승당(昇堂)을 어이 하리!”라는 구절이 있지요. 쉽게 말하면 조급하지 말고 차근차근 공부의 단계를 밟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기증상’이라는 말은 입실이 성공적일 경우에 마치 승당이라도 한 듯 조급한 허영에 부푸는 짓을 가리킵니다. 소란스레 입실한 윤종빈 감독의 근기 있는 승당을 기대합니다.
‘어려운 일을 겪어내는 것’[經難]이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진 못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시쳇말이 한결같이 먹힌다면 지옥은 이윽고 도인이나 성자들로 득시글득시글할 테다. 다만 위기상황은 반응을 약빠르게 단순화해서 사람들의 유형이 쉽게 드러나게 만들기는 한다. ‘극적 인물’들이란 그런 식으로 과장된 위기에 유형적으로 적응해 간 생활태도(Lebensf<00FC>hrung)를 분류한 것이다.
‘짬을 먹을 만큼 먹은’ 태정(하정우)은 이미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는 제대를 앞둔 병장이자 내무반장으로서 내무실의 살림과 정치에 실질적인 책임을 진다. 그는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며 그 조직을 있는 그대로 건사하기 위한 ‘체계의 노동’을 적절하게 수행한다. 사욕을 부리는 고참이라도 후임들 사이에서는 굳이 그 체면을 세워주려고 하고, 간간이 상병을 불러내어 “밑의 새끼들 좆같이 굴면 너부터 죽는다고, 새꺄!”라면서 멋지게 주먹을 날린다.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조직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필요한 유형의 인물이다. 모르긴 해도 태정은 전투 현장에 처하더라도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병사로 그려질 듯하다.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승인하는 태정과 부정하는 승영, 승인도 부정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지훈. 군대라는 체제의 폭력 앞에서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이들은 오늘도 ‘죽어도 말할 수 없는’ 침묵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
승영(서장원)은 태정이 살아내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어”라는 태정에게, 승영은 “난 군대가 진짜 이해가 안돼”라고 짓치고 든다. 태정이 병장일 때 이등병으로 전입한 승영은 영리한 신참내기가 으레 그러듯이 내무실에 횡행하는 ‘전통적 지배’(막스 베버)의 비합리성을 까발리고 싶어한다. “내무실에서도 슬리퍼가 필요하면 직접 가져다 신으면 되지, 밑의 애들이 그걸 왜 갖다줘야 돼?” 그러나 승영은 자신의 비판이 태정이라는 친구-고참의 존재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 말년 병장인 태정은 승영에게도 고스란히 돌아갈 체계 속의 그 ‘어리석은 반복’을 에언한다. “너는 짬 먹으면 안 그럴 것 같애?” 하지만, 승영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초심자의 초기증상 속에서 오직 모르기 때문에 더 순수한 음성과 기백으로 항의한다. “나는 밑의 애들 들어오면 진짜 잘해줄 거야.”
승영의 밑으로 들어온 지훈(윤종빈)은 군대를 통과한 우리 모두가 여태 생생히 기억하는 그 유명한 ‘고문관’이다. 태정이 묵인한 현실이자 승영이 저항한 군대라는 현실 앞에서 지훈은 내내 정신을 못 차리며 고참들의 비웃음을 산다. 그에게 군대라는 공간은 묵인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곳은 완벽한 비현실이며, 그는 맹하게 정신이 빠져 있다. 사회에서는 “잘나갔다”고 스스로 변명하지만 지훈은 전화를 받는 단순한 노릇에도 영영 익숙해지지 않고, 네자리숫자의 전화번호 몇 개도 변변히 외지 못한다. 그의 사수인 태정은 그를 가르치다 못해 그의 귀를 비틀며 “이 외계인 새끼”라고 고함을 지르고 만다. 그러나 그 외계인이 발을 들여놓은 바로 그곳이 그에게는 오히려 영영 적응할 수 없는 외계였던 것이다.
고문관, 혹은 외계인인 지훈은 군화끈으로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군대라는 외계에서 영영 벗어난다. 피할 수 없이 다가온 현실을 승인도 부인도 할 수 없을 만치 무력했던 그는 영내에 발을 딛고 있지만 그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는 유령 같은 존재였고, 마치 떠나온 차안을 잊지 못하는 유령처럼 세상 밖으로 줄창 전화질을 해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애인(수현)만을 찾는다.
그리고 그 짐은 지훈이라는 존재를 알리바이 삼아 자신의 저항을 합리화하려 했던 승영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지훈이 남긴 비극적 상처의 짐을 떠맡은 승영이 이미 제대한 태정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다. 바로 이 대목은, 군대의 부조리에 대한 승영의 저항이 워낙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내적 구조를 잘 보여준다. “나는 밑에 애들 들어오면 진짜 잘해줄 거야”라던 자신의 다짐이 지훈의 자살로 허물어지자 승영은 저항의 허약한 토대를 스스로 드러내며 태정을 찾아가 울면서 그의 위안을 구한다. “태정아, 괜찮다고 얘기해줘, 다 이해한다고 …” 그러니까, 얼핏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승영의 진실은 외려 태정에게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승영의 비판이 종종 태정과 같은 ‘군대 체질’을 향하지만, 그 비판은 곧 태정이라는 친구-고참의 존재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훈의 자살을 통해 사후적으로 확인된다. 그 저항의 비밀은 태정이 승영의 우상이자 대타자(大他者)였다는 자가당착 속에 있는 것이다. (종교나 연애 등과 같은 사랑의 구조가 꼭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태정의 눈에 비친 승영은 그닥 남자답지 못한,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싯적의 친구일 뿐이다. “넌 내가 봤을 때, 어른이 먼저 돼야 돼, 새끼야!” 물론 휴가 나온 승영을 기피하려는 태정의 태도는 ‘남자-어른답지 못한 승영의 존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억을 앓는’(프로이트) 증상은 비단 승영들만의 것이 아니라 태정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제대군인 전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멋지고 남자답게 군대 세계를 통과해 나온 태정에게도 군대는 “기억이 나지 않(아야 하)는” 사건들이다. 승영과 태정의 불화는 실은 모든 군인과 제대한 민간인 사이의 불화를 유형화한 것일 뿐이다. 군인이었던 민간인은 과거를 잊고 싶어하고, 민간인이었던 군인은 현재를 강박적으로 발설하고 싶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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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철학자
20080726한겨레
** http://blog.daum.net/ddungmo/614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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