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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붉은 그리움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박남준

by 오직~ 2007. 3. 23.
» 시인이 사는 악양 지리산 자락 호젓한 길에 매화 한 그루가 양껏 꽃을 피웠다. 성급한 홍매는 먼저 피었다 모두 졌다.
북상하는 꽃길 따라-문인들의 봄편지
 

군불견(君不見),
내 그리움으로 쓴다. 그대에게 쓴다.
오늘 아침에는 마당 앞 작은 텃밭에서 겨울을 견뎌온 것들, 시금치와 배추를 뽑아 다듬었다. 여기는 남쪽, 그리고 지난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지 않은가. 작년 가을에 뿌린 푸른 시금치는 몇 포기 캐지 않았는데도 대바구리에 가득할 만큼 잘 자라 주었고 배추는 얼고 말라붙은 겉잎을 몇 장 떼어내니 노란 속이 싱싱하더군.

 

그것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죽염으로 심심한 간을 하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나물무침을 했다. 옛날에는 된장도 조금 넣고 마늘도 다져서 좀 더 자극적인 나물무침을 했는데 나이가 들어 입맛이 변한 것일까. 어지간하면 그냥 본래 나물 맛이 나도록 참기름도 잘 쓰지 않고 소금간만 슬쩍 해 먹는다.

 

한 그릇의 밥을 달게 비우며 내 입맛의 변천을 곰곰 떠올린다. 간장에 날달걀을 깨서 넣고 비벼 먹던 어린 날 최고의 밥상과 초등학교 졸업식 때 처음 먹어 보던 짜장면의 추억 말이야. 요새는 사람들이 자장면이라고 한다지만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라고 불러야 더 맛이 나는 것 같고 격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물론 지금도 짜장면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리고 쇠고기가 어쩌다 헤엄을 치고 있는 무국이나 미역국과 이런 봄날 푸른 보리 싹을 넣고 끓인 달디단 보리순 된장국, 일년에 한두번 고향집을 가면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꽃게탕과 이맘때쯤의 법성포 준치회에 곁들이는 월동추와 소주가 입맛을 다시게 한다.

 

군불견
눈을 뜨는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 살펴본다. 오늘은 어떤 새싹이 올라오는가. 또는 무슨 꽃대가 하늘을 밀어 올리는가 하고 말이야. 오늘 아침 마침내 수선화 꽃 한 송이 포문을 열었다.

 

재작년 제주도의 풍경에 미친 사람, 그림 그리는 술꾼 강요배형이 택배로 한 상자 구근을 보내온 것인데 이사를 온 몸살이 심했던지 작년에는 잎만 무성하게 올라오고 감감 무소식이다가 며칠 전 꽃대를 밀어 올리더니 올해, 오늘 아침 처음 꽃잎을 열었다.


금잔옥대라고도 부른다던가. 황금의 잔에 백옥의 잔 받침을 하여 술을 마시면 어떤 기분이 들까. 흥취가 날까? 아닐 거야. 아무렴 꽃 옆에 앉아 향기로움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인다거나 수선화 꽃 한 송이 술잔에 띄워 마시는 것만 할까. 한 송이 흰 수선화 꽃향내가 절정의 매화들과 더불어 온종일 푸른 샘물을 길어 올린다.

 

홀로 앉아 찻잔에 매화꽃 한 송이 띄운다.
눈 속에서도 꽃들 피어난다. 꽁꽁 언 지리산의 한밤에 산수유 노란 꽃 사태….
험하고 변덕스러운 세상의 하늘에 당당히 맞서는 작고 여린 것들이여.
그 앞에 앉아 고개 숙인다.

 

군불견
홀로 앉아 찻잔에 매화꽃 한 송이 띄운다. 며칠 전 하동 지리산 자락엔 매화꽃이 난분분 지천인데 진눈깨비이다가 싸락눈 풀풀 날리는 매서운 찬바람 몰아치며 꽃샘추위가 대단했다. 세상 사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비바람이다가 진눈깨비이다가 햇살이 쨍쨍거리다가 때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한여름 우박이 퍼붓는 예측불허의 일을 만나기도 한다.

 

거기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어 속절없이 주저앉아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힘겹고 고통스러우나 시련에 맞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 녹차 위에 매화 꽃잎 한 송이를 띄워 마시면 그윽한 차향에 아찔한 매향이 콧속으로 파고든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며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저마다의 긴 강을 건너가는 일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대가 고이지 않고 흐르며 건너가는 강과 내가 건너야 할 멀고 먼 부단의 강물을 생각한다.

 

다시 또 눈보라, 눈 속에서도 꽃들 피어난다. 노란 햇살을 터뜨리듯 산수유 꽃이 긴 겨울의 기지개를 켜며 눈보라 아랑곳하지 않는다. 알에서 갓 깨어난 노란 병아리떼가 삐약삐약 쫑쫑거리듯 산수유 노란 꽃 사태가 봄을 부르고 있다. 여기 지리산의 한밤, 문밖에 나가니 얼음이 꽁꽁 얼었다.

 

봄볕을 기웃거리며 새싹을 내밀고 꽃대를 밀어 올리던 작은 꽃들이 다 얼지 않았을까 몰라. 뭐라도 덮어주었어야 했었나. 내일은 날이 좀 풀리려나. 이게 마지막 추위겠지. 한밤, 작은 꽃들의 안부로 잠자리를 뒤척이다 쓴다.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절정을 건너온 매화꽃잎이 바람에 휘날렸다

향기로운 매화의 봄은 그새 떠나고 마는가
이제 기약할 수 있는 내일의 시간이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지천명의 나이 아닌가
꽁꽁 얼음이 얼고 삼월춘설,
백발가를 불러주랴 눈발은 휘날리는데
뜰 앞의 진달래 꽃봉오리 부풀었다
봄이 와도 다 봄 같지 않다더니
어떤 그리움으로
이렇게 성급히 마중을 나왔더란 말이냐
이대로 연분홍치마 드리울 수 있겠느냐
눈 들어 차마 못 보겠다
네 참을 수 없는 마음 때문이다
진달래 연분홍 붉은 머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랴
갈 곳 없는 마음이 네 그리움 곁을 맴돈다 어지럽다
연분홍 붉은 그리움아

 

군불견
진달래 한쪽 아래 좁쌀만한 땅을 차지하고 나 여기에 있다고 노루귀꽃 피었다 밤새 얼었다 녹았다 한 사나흘 몸살을 앓더니 꽃잎이 그예 검버섯처럼 제 고운 빛을 잃었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 추운 겨울을 건너왔는데 그래 이건 너의 탓이 아니다. 최선을 다했겠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벌써 무슨 벌레에 싹둑 꽃대가 잘리운 아이들도 있지 않느냐. 험하고 변덕스러운 세상의 하늘에 당당히 맞서는 작고 여린 것들이여. 그 앞에 앉아 고개 숙인다

 

» 시금치와 배추 나물, 묵은지와 잡곡밥으로 이루어진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 사진 박남준
군불견
얼레지꽃대가 며칠 전부터 얼굴을 내밀고 있었지. 오늘일까. 내일일까. 첫 상견례를 하며 눈을 맞추려고 두근거렸는데 잎사귀며 꽃대가 땅바닥에 축 처져 있는 것이 아닌가. 꽃대를 들고 땅을 헤쳐 보니 그 아래 긴 구멍이 나 있었다. 두더지구멍이었다. 맥이 풀리고 잔뜩 화가 났다. 이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뭐라고 뭐라고 욕을 퍼부었다. 방안에 시들기 시작한 얼레지 잎과 꽃대를 들고 와서 작은 잔에 꽂아 놓았다.

하루가 지나니 물기를 머금은 잎과 꽃대가 싱싱해 보인다. 얼레지는 모악산에 살 때부터 키우던 것을 이사를 올 때 가져온 것인데 작년에도 얼레지꽃 한 송이를 두더지가 싹뚝 해버린 적이 있어서 속상함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다.

 

쑥국과 냉이국과 어쩌다 달래무침에 밥을 비벼먹기도 하고 쑥부쟁이나 어린 머위나물 무침들이 요즈음 봄날의 식단표다. 그러니까 밥과 국 한 그릇 그리고 김치는 대부분 변함이 없지만 이런저런 봄나물무침 한 가지를 특식으로 삼는 맛이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의 여기저기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며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이 봄날 꽃 한 송이 덧없이 꺾여졌다고 안타까워하거나 나물무침 한 접시를 만들어 놓고 즐거워하는 일이 썩 보기 좋은 일은 아니겠지.

 

군불견
일찍부터 피어나던 노란 복수초꽃들은 꽃잎을 다 떨궈내고 씨방을 토실토실 부풀리고 있다. 그 옆에는 깽깽이꽃대가 종알종알 우북우북 솟아오르고 모란꽃봉오리도 제법 꽃봉오리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아랫마을에 내려가니 하얀 목련꽃봉오리가 터질 듯 물이 잔뜩 올라 있는 곳이 대부분인데 어느 집엔 벌써 한두 송이 그 하얀 꽃잎의 자태를 드리운 나무도 있다.

한꽃이 지면 한꽃이 피어나고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대한 생명의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맞물려가며 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안에 한점 티끌인 나, 얼마나 남루하고 부끄러운 존재인가.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지. 그러나 또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것이냐. 조화로운 생명과 대자연의 질서는.

 

삼월이 가고 있다. 내 삶의 마음 밭에, 그대 또한 뿌려야 할 씨앗과 키우고 피우며 함께 나눠야 할 일들을 생각한다. 세상을 따뜻하고 환하게 물들일 꽃들을 생각한다.

 

시인 박남준

20070323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