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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강변호텔 _ 홍상수

by 오직~ 2019. 4. 9.

누군가에게 미안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지.

우리 모두는 죽어가고 있으며...



감독 : 홍상수 2018


배우 : 기주봉, 김민희, 송선미, 권혜효, 유준상

20190401 서울극장





<강변호텔> <공작> 배우 기주봉, "감독에게도 연기자에게도 모든 영화는 서로에겐 초심이다"

-로카르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은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정재영 배우 이후 두 번째다. 축하드린다.

=전혀 예상 못했다. 아직 얼떨떨하다. 물론 기쁘긴 했지만 본래 그런 들뜬 기쁨은 찰나이지 않나. 지금은 또 담담하다. 그보다 기억에 남는 건 로카르노의 관객이다. <강변호텔> 상영이 끝난 뒤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를 해줘서 처음엔 이게 뭔가, 왜 이러나 싶더라. 저녁에 로카르노 근처를 산책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영화를 잘 봤다며 계속 인사를 하는 거다.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함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분 좋았다. 막상 시상식 때보다 그 분위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의외로 상복이 없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로 올해 들꽃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게 영화 관련 첫 수상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특별히 의식해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 누가 말해주기 전엔 나도 몰랐다. (웃음) 올해 공교롭게 감사한 소식들이 여럿 들려오는 것 같다. 이번에 로카르노영화제를 가면서 신기한 체험을 하긴 했다. 홍상수 감독의 권유로 함께 출발하는데 비행기를 타면서 괜히 눈물이 나는 거다. 슬픈 것고 기쁜 것도 아닌데 이유도 없이 그냥 문득 눈물이 쏟아졌다. 홍 감독과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머쓱해서 혼났다. 밤에 밀라노에 도착해서 로카르노로 가는 길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비도 오고 있었는데 어두운 하늘이 점점 환해지면서 탁 트인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한 귀하고 드문 시간이었다. 나중에 수상을 하고 보니 이러려고 그랬나 싶어 모든 상황이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2007년 <밤과낮>부터 <하하하> <북촌방향>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풀잎들>까지 홍상수 감독과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같은 세월을 통과해가는 감독이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지난해에 대마초 문제로 힘들 때 홍 감독님이 함께 <풀잎들>을 찍자고 손을 내밀어줬다.(기주봉 배우는 2016년 12월 대마초 흡연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2018년 8월 23일 선고된 1심 재판에서 범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편집자) 수염도 기르고 다소 피폐한 상태였는데 그대로도 괜찮다고 해줬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강변호텔>을 찍었다. 괜찮다는 그 말이 알게 모르게 힘이 된 것 같다. 딴생각 안 하고 다시 연기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1977년 극단 ‘76’ 창립단원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어느새 출연 영화가 120편이 넘었다. 2000년대 한국영화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나 되나. 일일이 세어본 적이 없어서. 연극을 한 게 대략 120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나. (한참 생각을 정리하다) 출연한 영화와 연극의 편수가 비슷해졌다는 게 뭐랄까, 참 신기하다. 한동안 한국영화가 기주봉이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구분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자주 출연하긴 했지. (웃음)


-크고 작은 역할을 맡았지만 초반에는 형사반장을 주로 맡았다. 최근에는 믿을 수 있는 인생 선배 또는 아버지 역을 자주 하는 것 같다.

=한창 형사, 검사 등등을 맡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비슷한 역을 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매번 다른 인물인데 그저 직업이 형사였던 거지. 최근에 변화를 느끼긴 한다. 역할의 문제라기보다는 숙성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 부쩍 스탭들에게 캐릭터가 묘하게 나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의 변화이기도 하고 함께하는 감독의 변화이기도 하다. 홍 감독처럼 오래 함께한 감독들은 좀더 깊숙한 곳에 있는 걸 끄집어내주기도 하고. 작품마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받는다. 서로에게 적응해나간다고 해야 하나. 그 시간들이 작품에도 묻어나는 거겠지.


-예전에 했던 인터뷰 중 “연출자는 가둬두려고 하고 배우는 빠져나가려고 하는 존재”라는 말이 참 인상 깊었다.

=결국엔 서로의 이미지를 맞추는 작업이다. 예컨대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때는 임대형 감독이 어미의 고저장단까지 정확히 그려왔다. 감독의 비전이 그 정도로 선명하면 오히려 이미지를 구현하기가 쉽다. 그렇다고 기계처럼 원하는 것만 구현하는 것과는 다르다. 작품마다 그에 맞는 형상을 그려나가야 하는 거지 내 몸에 익은 어떤 습관들에 기대면 안 된다. 모든 영화가 서로에겐 초심이다. 같은 연극이라도 매 무대가 다른 것처럼 그 안에서 새롭게 찾을 게 무엇인지 항상 발견해나가고자 한다. 홍상수 감독처럼 화면과 상황을 상당히 자유롭게 열어주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배우 기주봉이 걸어온 세월이 묻어난다.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같은 무성극에 출연하는 중년 사내 또는 잘 몰랐던 아버지가 거기에 서 있다. 그건 시인이자 아버지를 연기하는 <강변호텔>에서도 이어진다.

=그동안 여러 역할을 했지만 결국은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때, 내가 나를 찾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다. 비극배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간 무대 위에서 비극을 많이 소화했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웃음을 바라는 마음이 항상 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길 좋아해서, 웃는 게 좋아서 배우가 됐다. 장난기라고 해야 할까, 기본적인 정서에는 그런 게 깔려 있었다. 그게 너무 가벼운 게 아닌가 싶은 시기도 있었다. 배우의 사색, 우울, 고민을 거쳐 지금에 이른 셈이다. 슬픈 와중에 웃음을 슬쩍 바라보는 태도랄까. 그러다보니 스타일 아닌 스타일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아니,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서랄까. 배우가 특정 캐릭터에 고정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다. 차라리 상황에 맞게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분위기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삶을 달관한 쓸쓸함이라고 할까, 무겁지만은 않은 체념의 정조가 묻어난다.

=체념이라면 뭔가를 포기한 것 같아서 무섭고. 어떤 정조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게 지나온 세월일 수도 있고 삶 혹은 연기에 대한 내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몇 마디 단어로 특정하긴 어렵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영화마다 감독과 나의 교차점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흐름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머릿속에 항상 그리면서 표현한다. 큰 의미에서 연기는 연극과 영화가 다르지 않다. 결국엔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겪어온 감정들의 연장이고 그 어딘가에서 캐릭터와 만나기 마련이다.


-한쪽에는 배우 기주봉이 보이는 영화가 있는 반면 같은 시기 완전한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영화가 있다. <공작>에서 김정일 역을 맡았는데 자막이 올라가기 전까진 기주봉 배우인지 몰랐던 사람이 대다수일 정도로 진짜 김정일이 화면에 앉아 있다.

=막상 보니 나도 흥미로웠다. <강변호텔>이 딱 같은 시기에 개봉했으면 진짜 재미있었을 것 같다. <강변호텔>은 좀더 자연스러운 나, 배우 기주봉이 보인다면 <공작>은 철저히 영화가 필요한 캐릭터를 재현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진짜 김정일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자료는 많이 봤다. 그러나 <공작> 속 김정일 역시 일종의 해석과 표현이지 단순한 흉내가 아니다. 윤종빈 감독은 오히려 설정만 주고 내게 맡겨줬다. 인물로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에 말투, 동작, 태도를 나름대로 설정해서 표현했다. 냉철하고 단호하며 직관력이 뛰어난 인물. 자존심과 자부심도 세고. 그걸 손동작, 눈짓 하나로 절제해서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이 정도로 특수분장을 하고 연기한 적도 없었을 텐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물리적으로 힘든 건 있었다. 분장만 다섯 시간이 걸리니까. 그런데 더 걱정되는 건 다른 거였다. 정작 분장을 다 마치고 나서 거울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봐도 김정일 같지가 않은 거다. 어딘가 어색해서 처음엔 걱정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에 찍힌 모습을 보니 신기하게 김정일처럼 보이더라. 내가 생각했던 것을 쏟아내고 합쳐진 다음에야 김정일이라는 인물이 완성됐다고 해야 할까. 최신의 특수분장도 결국엔 보조장치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강변호텔>은 늙은 시인이자 아버지의 이야기다. 호텔 주인의 배려로 한 호텔에 머물던 시인이 문득 아들들을 불러 시간을 나누려 하고 그 와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시인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서정적인 영화다. 동시에 끈적이는 무언가가 있다. 대단한 사건도, 이야기도 없지만 평범한 대화와 잡담 속에 삶의 어떤 순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뒤통수만 보여도 거기서 표정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게 홍상수의 카메라가 지닌 매력이다.


-이번 로카르노영화제 남우주연상 선정의 변 중 “감정, 몸짓, 눈짓을 통해 자신의 말을 전달할 줄 아는 배우”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보니 딱 들어맞는 표현같다.

=내 연기가 ‘거짓이 아니다’라고 전달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연기를 시작하고 꺼지면 연기가 끝나는, 단절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어떤 움직임의 모음들이다. 어릴적부터 목표로 삼았던 것 중 하나가 ‘등이 열려 있는 배우’였다. 등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배우. 이제야 조금씩 등이 열리는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게 감사하다. 이번에 수상 소감을 통해 네 가지에 대한 감사를 밝혔다.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과 관계자들, 홍상수 감독과 <강변호텔> 스탭들, 로카르노에 오는 동안 만난 자연의 풍광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 그 말을 듣고 홍상수 감독이 딱 한마디 말을 더 보탰다. ‘우주의’ 보이지 않는 것들.


-2008년 <씨네21>과 인터뷰할 당시 앞으로의 남은 꿈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기회가 되면 지구를 우주에 소개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강변호텔>이 그 꿈을 이뤄준 영화처럼 보인다.

=내가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들이 다시 내게 돌아올 때마다 신기하다. 얼마 전 청송에 후배의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지방에서 20, 30년 동안 쭉 연기를 해온 친구인데 그 후배가 내가 해준 말을 항상 가슴에 품고 연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배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뭘 배워, 네가 만나는 사람이 전부 네 상대역이고 네 스승이지”라고 했다는 거다. 솔직히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웃음) 후배들을 만나면 선배님의 어떤 말 때문에 자신이 아직 연극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런 후배들을 볼 때마다 40년 세월이 실감이 간다. 헛되게 살지 않았다 싶어서 울컥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고, 잊고 사는 것을 잊지 않게 되새겨주고, 생각지도 못한 관계들이 이어지는 것. 연기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면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 다시 앞으로의 남은 꿈을 말씀해준다면.

=(한참 고민하다) 중년을 늘리자? (웃음) 어떨 땐 세월이 나를 숙성시켜주는 것 같다가도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고. 젊은 땐 ‘앞으로’ 어떻게 될 지를 자주 생각한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지금에 집중하게 된다. 바람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오래 연장하고 싶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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