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송숲 고즈넉한 마을 톡 쏘는 오전약수 ‘꿀맛’
산책하고 숙박할 수 있는 정자·고택도 곳곳에
완행버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지역 주민의 일상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버스 안팎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대부분 일상생활 속의 행인들이다. 깊고 깊은 산골 고장 경북 봉화의 완행버스에서 만난 것도 평범하면서 신선한 풍경과 사람들 표정이었다.
봉화공용정류장에서 출발하는 두 노선의 완행버스를 탔다. 닭실마을~법전면~춘양면~서벽리 백두대간수목원의 동쪽 노선과 물야면~오전약수탕의 북쪽 노선이다. 모두 산길 따라 가을 깊숙이 파고드는 오지 노선이다. 진한 가을빛 드리운 산자락과 논밭에선 사과·벼 수확이 한창인데, 그 사이로 옛 선비 자취 서린 정자와 서늘한 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봉화읍 공용버스터미널에서 물야·오전약수탕 방면 차에 오르는 어르신들.
삼계리~닭실마을 사이 석천계곡의 바위글씨 ‘청하동천’.
봉화장 구경 뒤 닭실마을로
‘봉화공용버스터미널’이 아니라 ‘봉화공용정류장’이다. 규모나 분위기는 여느 시·군 ‘터미널’과 같은데 ‘정류장’이라니, 소박하고 정겹다. 닭실(달실·酉谷)마을 거쳐 가는 춘양행 버스(동쪽 노선)를 기다리는 동안, 정류장 맞은편의 봉화장(2·7일장) 구경에 나섰다. 마침 장날이다.
“송이 쫌 디리 가소. 이래 보이도 향이 차암 좋니더.” 송이버섯과 사과, 봉화의 대표 농산물 두 가지가 시장을 지배한다. 송이버섯은 채취가 진작 끝났을 텐데도, 갓이 다 벌어진 버섯을 내놓은 좌판들이 여러 곳 보인다. 한창 제철을 맞은 부사 사과는 과일가게마다 산더미처럼 쌓였다. 봉화장 옆 상설시장 골목엔 무·풋고추·콩·대추·땅콩 등 할머니들이 한 보따리씩 이고 지고 와 풀어놓은 좌판들이 깔렸다.
대추 한 봉지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첫 방문지, 닭실마을까지는 5분 거리다.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1시간 동안 청암정과 한과로 이름난 닭실마을을 둘러봤다. 지형이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금계포란형)이어서 나온 이름이다.
조선 중기 문신 충재 권벌이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충재 고택의 문은 닫혀 있지만, 대표적 볼거리인 전통 원림(정원), 청암정은 개방돼 있다. 거북바위에 올라앉은 정자 청암정과 인공연못, 그리고 소박한 서재 건물 충재가 붉게 물든 단풍나무와 어우러져 옛 멋을 더해준다. 옆의 충재박물관에서 옛 문서와 서적 등 종가에 전해오는 보물급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석천계곡의 또다른 정자 석천정도 둘러볼 만하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의 정자 청암정. 거북바위 위에 청암정(오른쪽)을 짓고 물을 끌어와 둘레에 못을 만들었다. 왼쪽 건물은 서재인 ‘충재’.
“우리 고장 문화재 우리 손으로 지켜야”
다시 버스에 올라 법전면으로 향했다. 버스는 가을걷이가 한창인 논과 밭을 지난다. 멀리서 봐도 붉은빛 도는 사과나무밭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낸다. 법전리는 진주 강씨(법전 강씨) 집성촌이다. 1854년 지은 아름다운 정자 경체정을 감상하고 있는데, 한 떼의 어르신들이 몰려온다.
“문화재 둘러보면서 쓰레기도 줍고 친목도 다질라꼬 모인기라.”(춘양 만산고택 주인 강백기씨) 주로 고택·종갓집 주인, 문화해설사들로 구성된 ‘봉화 문화재 지킴이’들의 모임 날이란다. “우리 고장 문화재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신념을 가진, 믿음직한 어르신들이다. 법전리에는 작지만 군더더기 없는 멋을 자랑하는 정자 경체정·이오당과 고택 기헌고택·송월재종택·해은구택·법전강씨종택이 걸어서 5분 거리에 모여 있다. 고택들엔 주민이 살고 있으므로, 둘러보고 싶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게 좋다.
버스는 ‘춘양목’(금강송·황장목)으로 이름난 고장 춘양면으로 접어든다. 춘양면 일대에서 생산된 금강소나무를 춘양목으로 부르는데, 1950~60년대 질 좋은 금강송이 춘양역을 통해 전국으로 실려 나갔던 데서 나온 이름이다.
춘양시장(4·9일장) 들머리엔 ‘억지춘양시장’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억지춘양’ 또는 ‘억지춘향’은 어떤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억지로 이룬다는 속담이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철도 노선을 춘양 쪽으로 억지로 끌어온 데서 유래한 말이라 ‘억지춘양’이 맞다”고 설명했다. 1950년대 영주~철암선 철도 건설 때, 직선으로 계획됐던 철로를 이곳 국회의원이 춘양면으로 돌아가도록 바꾼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법전면 법전리의 정자 경체정.
춘양면 의양리 만산고택의 별당 칠류헌.
‘춘양목·억지춘양’ 고장에도 볼거리 즐비
춘양면소재지 의양리 일대에도 정자·고택이 이어진다. 수백년 묵은 회화나무·느티나무 숲그늘에 숨은 정자 한수정이 아름답다.
만산고택(1878년 건립)엔 흥선대원군(사랑채의 ‘만산’ 현판), 영친왕(서당의 ‘한묵청연’ 편액) 등 유명인의 현판·편액이 내걸려 있어, 다양한 서체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일부는 복제품이다. 별당 건물인 ‘칠류헌’은 고택 숙박 체험장으로도 이용된다. 또다른 고택 권진사댁과 신라 말기 석탑 한 쌍(서동리 석탑)도 있어 둘러볼 만하다. 춘양시장과 정자·고택을 걸어서 둘러보려면 2시간은 잡아야 한다.
공군아파트 앞 정류소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애당리 지나 서벽리로 향한다. 버스는 봉화장 보고 가시는 할머니·할아버지 네댓 분을 태우고 가을빛 짙은 산길을 지난다. “마이 샀드나?” “쪼매 샀다.” “배차(배추) 연한 게 차암 좋드라. 근데 무거워 가갈 수가 있노 어데. 호호.” 할아버지들 대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이 땄나?” “오백키로 땄다.” “값이 헐타.” “그래가 안동으로 안 보냈나.” 차창 밖으론 빨간 사과들로 숲을 이룬 사과나무밭이 줄지어 지나가고 또 다가온다.
서벽리는 수백년 묵은 금강송숲과 알싸한 맛의 두내약수로 이름난 곳이었다. 소나무숲을 포함한 서벽리 일대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이 들어섰다. 대규모 지하터널형 산림종자 영구보존 시설인 ‘시드 볼트’엔 산림종자 200만점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2017년 정식 개장 예정이지만, 지금도 전기차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예약 필수. 물맛 좋던 두내약수는 폐쇄돼 안타까웠다. 찾아가 보니, 깨끗했던 샘터가 가랑잎에 뒤덮여 볼썽사납게 변해 있었다. 수목원 공사로 계곡 물길을 다른 데로 돌리며 수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봉화에 지천인 사과나무밭.
물야면 노선엔 ‘이몽룡 생가’·오전약수탕도
톡 쏘는 약수를 제대로 맛본 건 다음날 찾아간, 물야면 버스 노선(북쪽 노선) 종점인 오전약수탕에서였다.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는 오지 산골의 버스 종점 약수터에서 맛본 약수는, 입안 전체를 온통 알싸하게 휘감는 짜릿한 맛이었다.
물야면 노선에서 들를 곳은 북지리 마애여래좌불(국보)과 가평리의 고택 계서당 두 곳이다. 보호각에 둘러싸인 이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은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려 눈도 코도 입도 희미해진 모습이다. 지림사 대웅전 뒤 바위벽에서도 닳아 희미해진 마애불과 마애탑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계서당은 조선 중기 문신 계서 성이성이 살던 집인데, 입구 표지판엔 ‘이몽룡 생가’라 표기돼 있다. <춘향전> 등장인물의 실존 여부엔 논란이 있지만,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 된 인물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성이성의 부친 성안의가 남원부사를 지낼 때 성이성이 함께 살았고, 과거에 급제한 뒤엔 4번이나 암행어사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소설에선 실명 거론이 부담스러워 주인공 성을 이씨로 바꿨고, 대신 춘향의 성씨로 정했다는 얘기다. 어찌 됐든, 고색창연한 옛 모습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고택임은 틀림없다.
물야면 북지리의 마애여래좌상(국보). 통일신라시대 것이다.
대중교통 동서울터미널에서 봉화공용정류장까지 하루 6차례 고속버스가 운행된다. 2시간40분 걸림. 1만7300원. 봉화군내 완행버스 요금은 모두 1300원이다. 현금으로 내도 되지만, 매표소에서 미리 승차권을 여러 장 사두는 게 편하다. 봉화공용정류장에서 춘양면·서벽리 방면은 하루 18차례, 물야면 방면은 하루 16차례 완행버스가 운행된다. 운행 간격은 20분~1시간10분으로 차이가 심하다. 시간대마다 간격이 다르므로 내릴 때 다음 버스 도착시간을 확인해둬야 한다. 서벽리와 오전리 오전약수탕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7㎞ 거리에 불과하지만, 연결 버스편이 없다.
먹을 곳 봉화공용정류장 부근 일미식당의 백반과 청국장(6000원), 봉화시장 안 명성칼국수의 손칼국수와 손만둣국(5000원), 석천해장국집·삼성식당 등의 소고기국밥(6000원)과 송이국밥(9000원~1만5000원), 춘양시장 안 동궁회관의 엄나무순돌솥밥·송이버섯돌솥밥(1만2000~1만6000원) 등. 물야면 오전약수탕 주변에도 닭·오리백숙 등을 내는 식당이 있지만 1인용 식사는 내지 않는다.
묵을 곳 봉화읍에 봉화모텔(1박 5만원) 등 모텔이 있고, 춘양에도 동아모텔 등 2곳이 있다. 만산고택과 권진사댁에서도 묵을 수 있다. 1박 5만원부터.
봉화읍 삼계리 삼계서원 옆 농가의 느티나무. 농가에서 대대로 한달에 두번씩 제를 올려오는 나무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686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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