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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찾아서

곡성 _ 나홍진

by 오직~ 2016. 5. 13.

 

감독 : 나홍진 2015作

배우 :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쿠니무라 준

20160512서울극장

 

 

...

절대 현혹되지 마라.

 

"자네 낚시할 적에 뭐 어떤 게 걸려 나올지 알고 하는가?

그 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뭐가 딸려 나올지는 몰랐겄지 지도.

그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말이여.

무슨 이유가 있는 거여, 이유가.

...

 

 

 

일단 <곡성>의 만듦새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을 듯하다. 영화는 엄청난 에너지와 흡인력, 그리고 섬뜩함과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신경다발을 움켜쥐고는 출구 없는 터널로 다짜고짜 끌고 들어간다. 봐주는 기미라곤 조금도 없다. <곡성>은 그렇게 어둠 속을 촉각으로 더듬으며 보는 영화다. 따라서 인공조명으로 이 터널 속을 밝히려는 시도는 그리 적합하지 않겠다.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무성한 ‘이론’과 ‘해석’에 즐거운 관객으로서 한마디 보태고자 하니 미관람 독자께서는 아쉽지만 읽으심을 멈춰주시길 당부드린다.

 

<곡성>은 ‘의심’에 관한 성경 구절 인용, 그리고 이어지는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우는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도입부를 통해 ‘의심이라는 미끼로 사람들을 낚는 낚시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실상 못박고 들어간다.

그렇다면 그 ① ‘의심’이란 무엇에 대한 의심인가? 결정적 힌트는 ‘불난 집’ 앞을 지키던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앞에 나타난 ‘무명’(천우희)의 대사에 숨어 있다. 무명은 종구에게 살인사건 목격담인 듯 ‘이 집 아주머니는 안 한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한사코 굿을 하자고 해서, 아주머니가 다 죽여 버렸어’라고 말한다. 굿을 하자고 한 것, 즉 이성(또는 신)에 대한 의심=‘미신’에 대한 믿음이 이 변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② 무명은 어떤 존재인가? 그 또한 그녀의 첫 등장에서 밝혀진다. 무명은 종구에게 계속 돌을 던지고 있는데 이는 명백히 ‘이 중 죄 없는 자들만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성경 구절의 차용이다. 무명은 ‘죄 없는 자’로서 종구의 ‘죄’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무명은 러시아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로지비’(진실을 말하는 성스러운 바보)의 모습 바로 그대로가 아닌가.

아무튼 논란의 핵심은 <곡성>의 하이라이트이자 근래 최고의 시퀀스라 할 굿판 시퀀스일 텐데, 사실 이 시퀀스의 편집으로는 누구라도 한국 무당 ‘일광’(황정민)이 살(殺) 펀치를 날리고 외지인이 그것을 방어하며 역공을 노리는 ‘무당 한일전’이란 느낌을 가질 것이다. 더구나 일광이 장승에 말뚝을 박는 장면의 편집으로는 누구라도 ‘일광이 딸의 몸에 들린 외지인의 악령을 몰아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굿 시퀀스를 보고서는 거의 누구도 무명이 외지인을 쓰러뜨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간파해내긴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이 시퀀스 내내 ‘무명’이 등장하는 부분은 굿에 앞서 폭포에서 ‘몸 만들기’를 하는 외지인을 엿보는 장면, 그리고 산막에 빈사상태가 되어 쓰러진 외지인 앞에 홀연히 나타나는 장면, 이 둘뿐인 마당에야.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변수가 끼어든다. 좀비가 되는 ③ ‘박춘배’의 존재다. 외지인은 박춘배의 시신 주위에 촛불을 밝혀둔 뒤 그의 사진을 제단에 놓고 주술을 하는데, 굿 시퀀스가 절정에 다다르면 사진에는 ‘물집’이 돋고 시체이던 박춘배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 뒤, 빈사상태에서 간신히 깨어난 외지인은 뭔가에 쫓기듯 박춘배가 있던 트럭으로 곧장 달려가는데, 박춘배는 사라져 있고 밝혀둔 촛불은 짓밟혀 있고 외지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다시 자신의 산막으로 허둥지둥 되돌아간 외지인은 이미 그곳에서 포복절도할(이 장면을 보면서 폭소한 것은 거의 필자뿐인 것 같더라만) 슬랩스틱을 선보이고 있는 좀비를 두려운 낯빛으로 숨어 구경할 뿐이다.

그럼 대체 이 좀비는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가능한 답은 역시나 무명뿐이다. 좀비는 한일 대결을 위장한 한일 합작 굿판을 저지하기 위해 무명이 만들어낸 원격조종 병기라는 (사뭇 초등학적인, 그러나 앞뒤는 맞는) 가설 말이다.

아무튼 무명은 사실상 이 영화의 테마를 체화한 캐릭터인데, 영화가 흩어놓은 여러 속임수에 의해 그런 그녀의 정체는 끝내 간파 불가다.(예를 들어, 매우 잠깐 등장하는 무명-외지인의 산중 추격 신은 명백히 무명이 외지인에게 추격당하고 있는 것처럼 편집돼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외지인을 공격해 빈사상태로 만든 것은 무명이었다. 더하여, 그 이전, 부상 입은 외지인 배경에 애수 어린 피아노 음악을 깔아 넣은 것 또한 또 하나의 밑밥일 것이다.) 나아가 영화는 ‘미신의 존재 그 자체를 믿지 말 것’을 강하게 설파하고 있으나, 정작 그 세계 안에서는 무당이 날린 ‘살’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등 주제적 차원의 모순까지 보이고 있는 등등 따지려면 끝이 없겠으나, <곡성>의 낚시는 <클로버필드 10번지> 같은 유의 소모적 낚시와는 분명 질적으로 다르다.

한번 상상해보자. 주인공을 위시한 마을 사람들의 외지인에 대한 의심과 혐의를 그대로 법정으로 가져가 ‘우리 집 장독에서 죽은 까마귀가 나왔다니까요!’ 등의 말을 했을 경우를. 정상적인 법정이라면 체포영장은 물론 수색영장조차 내주지 않을 것이다. 처음엔 동료 경찰에게 ‘피부과 탐문’ 등을 권하면서 나름 이성적 대응에 대한 의지를 보였던 주인공도, 결국 주위 사람들의 의심과 미신의 목소리에 그야말로 ‘현혹’되어 그 집을 무단침입하고 수색하지 않았던가.(물론 그렇다. 그 누구도 그를 나약하다거나 우매하다 비난할 수는 없다. 같은 상황에서 그처럼 행동하지 않으리라 자신할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맞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대단히 가혹한 도덕률로 옭아매고 있다.)

관객들 역시 ‘현혹’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는 ‘미신’의 존재와 힘을 자기도 모르게 긍정하도록 관객들을 현혹한 뒤 ‘가장 깊은 나락’(감독의 표현)까지 떨어뜨린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낚시는 분명 주제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생산적’ 낚시다.

잠깐. 그런데.

 

그렇다면 <살인의 추억>이 그랬듯, 이 영화의 핵심 테마는 결국 누군가를 의심할 때엔 정황-심증-루머 등등이 아닌 확실한 물증에 입각하라는 ‘재판 증거주의’에 대한 옹호가 아닐까 혼자서 생각해보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굳이 낚시의 목적이 아니라면 일본인의 대사 “言っても信じないだろう”의 번역은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가 아닌 “믿지 않을 것이다”로 바로잡아져야겠다. 왜냐면 이 대사는 그야말로 결정적인 대사이고 둘 사이에는 실로 큰 차이가 있으므로, 라는 말씀 덧붙이며 스포일러 충만한 감별에 갈음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448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