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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맴돌던 한 모금…그리고 질문을 받았다 - 이서희

by 오직~ 2014. 11. 3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66676.html

 

 

 

 

 

파티의 주최자인 크리스를 만난 것은 2년 반 전이었다. 모 카드회사와 샴페인 브랜드가 함께 마련한 디너파티였다. 어느 유명 감독이 직접 병을 디자인한 샴페인 출시를 기념하는 자리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열렸다. 우리 부부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에 크리스가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혈통의 미국인 남성으로 투자 관련 일을 하다 이제는 오지에 학교를 세우는 자선사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대화 도중 그는 일 때문에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파트너를 종종 언급했다. 그의 파트너는 행사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나타났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동양 청년이었다. 크리스는 남편과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로 몇 차례 자신이 여는 디너파티에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터라 번번이 거절했지만. 그러다가 며칠 전 남편이 물었다.

 

“크리스라는 남자 기억나니? 그가 또 초대를 했네. 매번 거절하기가 미안한데, 가고 싶니?”

 

70대 노인 알렉스와 20대 금발 미녀 사라

크리스의 집은 할리우드 힐스의 깊숙한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관 벨을 누르자 190㎝는 훌쩍 넘어 보이는 아름다운 청년이 문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짧게 밀어올린 머리에 구릿빛 피부, 푸른 셔츠와 청바지 밑으로 드러나는 탄탄하고 매끄러운 몸의 굴곡. 복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2층 테라스로 갔다. 말끔히 개어 있던 낮 하늘은 밤과 함께 먹물 같은 어둠을 입었다. 도시의 전경이 깜박이는 불빛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밤하늘의 별빛과 도시의 불빛은 경계를 허문 채 쏟아졌다. 테라스에 설치된 화덕이 타오르며 거침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렸고 청년은 크리스에게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시선이 일순 쏟아졌다. 크리스의 안내에 따라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고 우리 부부는 마거리타 한 잔씩을 손에 든 채 야외 소파에 앉았다. 그는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2년 새 나이를 조금도 먹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더 멋진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3층으로 올라가는 편이 좋겠다며 크리스는 우리 모두를 이끌고 2층 테라스에서 연결된 나선계단을 따라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 하이힐을 신은 터라 옮기는 발걸음마다 위태로웠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중년 남성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미끄러지면 바로 잡아줄 테니.”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금세 늘어났다. 투자 전문가에서 영화감독, 배우에 폴로 경기 주최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성애자임이 분명한 70을 훌쩍 넘은 노인 알렉스는 20대의 눈부신 금발 미녀 사라를 파트너로 데려왔다. 그들은 성적인 농담을 거침없이 주고받으며 모임에서 폭소를 유발했다. 사라는 스스럼없이 외쳤다.

 

“내 꿈은 말이지, 이 늙은 노인네를 유혹해서 제2의 애나 니콜 스미스가 되는 일이야.”

 

낄낄거리며 웃어대는 알렉스를 앞에 두고 크리스가 일어났다. 초대 손님들에게 건배를 권유하며 말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알렉스를 위해. 이건 그의 마지막 디너파티가 될 거야.”

 

농담의 수위는 아슬아슬했다. 모두들 거침없었고 즐거웠다. 바람이 더욱 서늘해지자 사람들은 3층 테라스를 떠나 1층 거실로 모여들었다. 여전히 바깥바람이 좋았던 나는 2층 테라스와 식당의 경계에 서서 와인 한 잔을 쥔 채 가만히 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다가왔다. 좀 전에 계단에서 내 뒤를 따라 오르던 남성이었다.

 

“난 시카고 출신이야. 이 정도 서늘함은 오히려 상쾌할 정도이지.”

 

눈초리가 가볍게 내려앉는 미소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말끔하게 면도된 뺨의 서늘한 느낌이라든가, 단정한 몸가짐, 세련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말솜씨도 좋았다. 우리는 금세 겨울 공기의 알싸한 느낌이라든가, 양 볼에 와 닿는 차디찬 대기의 신선함을 이야기했다. 마르고 서늘한 캘리포니아의 밤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내리는 눈과 얇게 저며지는 얼음과 두꺼운 옷자락 사이를 파고드는 한기를 추억했다. 그에게는 열일곱 살이 된 딸이 있다고 했다. 기껏해야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였기에 조금 놀랐다.

“아이를 일찍 낳았나 보구나.”

 

“응, 그런 셈이지. 이제는 아이가 훌쩍 자라서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아도 돼. 그 때문에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가끔 서글퍼지기도 하고.”

 

그의 이름은 마크였다. 나는 그에게, 내가 편의상 쓰고 있는 소피(Sophie)라는 이름 대신 내 본명을 가르쳐줬다. 그는 몇 차례 내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보았다. 서희, 서희, 서희. 썩 괜찮은 발음이라고 칭찬해주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다. 물론 18년간의 외국살이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곧 내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잊어버릴 것이다.

 

“생각했어, 이제 내 삶을 유혹할 때라고…”

잠시 후 열두 명의 게스트는 장방형의 디너 테이블에 촘촘히 둘러앉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크리스는 1974년 캘리포니아산 레드 와인을 따서 사람들에게 따라 주었다. 오늘을 위해 마크가 특별히 들고 온 선물이라고 했다. 인원수에 맞게 이미 테이블은 세팅되어 있었다. 와인 잔 옆에는 그 자리에 앉은 게스트를 위한 질문 카드가 놓여 있었다. 크리스를 시작으로 한 사람씩 지명하여 자신 앞에 놓인 카드를 읽었다. 몇 차례 질문이 오갔고 짧거나 긴 대답이 이어졌다. 다행히 내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미 술기운이 오른 듯한 알렉스는 마크에게 질문을 읽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품고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십 년 전 내가 에이치아이브이(HIV)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시점부터일 거야. 아내와 아이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이혼을 했지. 모든 것이 내 앞에서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어느 시점을 지나니 기묘한 평온이 찾아오더군. 내가 사는 하루하루가 영원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으리라는 자각 속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평온한 하루를 매일 보내기 시작했어. 그렇게 잊지 못할 하루하루가 모여 십 년을 이루었어. 그 느낌을 아는지. 하늘을 보면 그날의 햇살이, 구름의 움직임이, 바람이 볼에 닿는 촉감이,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어. 무심코 깨달았지. 아, 세상은 이토록 나를 간절히 유혹하고 있었구나. 나는 단지 그것을 바라볼 감각을 동면한 채 살고 있었구나. 그리고 생각했어. 이제 나도 내 삶을 유혹할 때라고. 이곳의 삶에 내가 얼마나 멋진 녀석인지, 한때 나를 품었던 것이 꽤 괜찮은 일이었다고 느끼게 하고 싶다고.”

 

잠시의 침묵을 깨고 그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오늘 들고 온 와인은 나의 부모님이 내가 태어난 해를 기념해서 사둔 와인이야. 나는 1974년 겨울에 태어났고 부모님은 그때부터 1974년산 와인을 수집하셨어. 나는 그들에게 아주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고 그들은 내 탄생을 두고두고 기념하고 싶었던 거지. 안타깝게도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한동안 이 와인들을 어떻게 처분할까 생각하다가 특별한 사람들과 만날 때면 들고 나가기 시작했어. 이 녀석과 나는 그럭저럭 사십 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거고 몇 년 전부터는 파트너처럼 함께 모임에 나가고는 해. 부디 맛이 괜찮았으면 좋겠어.”

 

그가 살았던 하루들은 잘 익은 와인 병을 따듯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되었을까. 나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인 1974년 와인을 삼켰다. 깊고도 시큼한 열기가 식도를 타고 흘렀다. 내 위장이 아닌 심장을 맴도는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불현듯 시카고의 창밖에 쏟아지는 눈보라와 한 아이의 탄생을 떠올렸다. 얼마 전 친구가 보내준 사이토 마리코의 시 <눈보라>와 함께. 마음으로 열렬히,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에게 경배를 올렸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지상에 안 닿아 있는” 눈송이로 그와 마주친 것을 축복하며. 그때 마크의 목소리로 내 이름이 울렸다. “서희, 다음 질문을 너에게 던지려고 해.” 그는 내 이름을 여전히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