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홍상수 2014作
배우 : 카세 료(모리), 문소리(영선), 권(서영화), 김의성(상원), 윤여정(구옥)
20140906 스폰지하우스광화문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자유의 언덕>을 봤다. 머리에 의문부호가 하나 남았다. 문소리가 연기한 ‘영선’이라는 인물이 마지막 장면에서 예뻐 보였다. 이전 장면과 특별히 변한 게 없는데도, 인물이 두텁고 풍성하게 와 닿았다. 영선이 한옥 미닫이문을 열고 상체를 내미는데, 평면 화면에서 사람이 입체가 돼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뭐지? 영선은 그다지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다. 사람 좋아하고 푼수기 있는, 홍상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여자다. 정감이 가지만, 2D 화면을 3D로 보이게 할 만큼 신선한 매력의 소유자는 아니다.
<자유의 언덕>은 이야기의 순서를 뒤섞는다. ‘권’(서영화)이라는 여자가 편지를 전달받는다. ‘모리’(가세 료)라는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남기고 간, 수첩 한장 한장에 적은 일기 형식의 편지인데, 날짜를 안 써 놓았다. 권이 이걸 떨어뜨리는 바람에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섞인 순서대로 영화가 흘러간다. 시간이 화두인 건데, 영화 속에서 <시간>이라는 책을 읽는 모리가 말한다. “책에 따르면 시간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삶을 꼭 그런 틀을 통해 경험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진화를 한 거라서 어쩔 수도 없고요.”
모리는 권을 찾아 청혼하려고 왔는데, 권이 집에 없다. 문에 메모를 붙여놓고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가까운 카페에 간다. ‘영선’(문소리)은 그 카페의 주인이다. 사람 좋아하고 푼수기 있는 영선은 모리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못하고, 모리는 권을 원하면서도 영선과 사고를 친다. 이런 이야기와 주변 인물의 에피소드가 ‘시간의 틀’을 깨고 뒤죽박죽 전개된다.
영화 보면서 머리를 많이 굴려야 했다. 이게 저 앞인가, 이건 뒤겠지? 이렇게 뒤집어 놓은 건 어떤 효과를 노린 거지? … 에이, 반전이 있는 스릴러도 아니고, 엎치나 메치나 매한가지일 텐데 정서에 집중하고 보자. … 그랬는데, ‘우리가 이렇게 진화를 한 거라서 어쩔 수 없이’ 또 이게 저 앞인가, 이건 뒤겠지? … 그러다가 마지막에 (시간대로 배치했을 때) 이야기의 중간보다 조금 앞으로 돌아가, 영선이 한옥 게스트하우스의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예쁘다. 이 예쁨은 뭐지?
미래의 모습까지 보고 나니까 더 괜찮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참 천진하다? 미래를 알고 보니 세상사가 허무해 보이고 인물은 더 애틋해 보이는 건가? 아니지. 그런 건 단순한 회상으로도 쌓을 수 있는 정서다. 왜 예뻐 보인 걸까. 이 영화의 독특한 형식이 내게 어떤 작용을 한 걸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와 미래를 두서없이 오간 끝에, ‘시간의 틀’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히기를 반복한 끝에, 마지막 장면의 영선에게서, 난 현재의 아름다움을 봤구나. ‘현재가 아름답다. 현재가 중요하다. 모리, 너는 그때 그 현재의 중요함을 몰랐구나. 영선, 너는 그때 네가 얼마나 예뻤는지 몰랐구나.’
쌓아놓은 신문을 본다. 저게 날짜가 안 찍힌 채 뒤섞여 있다면, 시간 순서대로 추릴 수 있을까. 신문을 볼 때 이따금씩, 어제오늘이 뒤섞인, 그래서 내일도 어제 같을 것만 같은 날들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갑갑해지곤 한다.
영선을 떠올린다. 현재가 아름답다. 현재가 중요하다. 신문을 볼 때 나처럼 갑갑해지곤 한다면, <자유의 언덕>을 권한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37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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