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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도마복음이야기1

by 오직~ 2012. 7. 12.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을 경(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원(遠)하는 데 있다.

 

 

AD 367년의 정경목록 확정 이전에는 기독교에 정경과 외경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정경이 없으니 외경도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문헌이 바이블이었고 성서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337년 만에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습이 최초로 역사의 지평 위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367년 이전에는 기독교에는 "신약성경"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어문일치형의 이집트말 표기법, 콥트어(the Coptic language)를 만들었다. 우리의 도마복음서는바로 이 콥트어로 쓰여진 것이다.

(이집트 말을 희랍어 문자로 표기하는 이두문자 = 콥트어)

 

 

신약성서는 크게 보면 5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4복음서가 있다. 예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전기문학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립사를 기술한 역사문학, 바울 14개 편지, 사도들의 7개 편지, 계시록 하나다.

 

 

예언은 하나님의 의도를 역사의 지평 속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묵시는 역사의 지평을 말살하고 역사를 넘어선 하나님의 초자연적, 초시간적 영역에로의 회귀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은 철저히 역사적인 반면 묵시는 철저히 비역사적이다.

 

 

유일신관의 존중이 왜 다원주의의 부정을 의미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진정한 유일신론은 종교적 문제를 포함한 삼라만상의 다원성을 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일(一)은 곧 다(多)이다. 진정한 유일신은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하나인 신은 전체일 수밖에 없다.

 

 

나그함마디 문서를 최초로 구매한 사람은 카이로 콥틱박물관의 토고 미나 관장이었지만, 그 문서의 가치를 고증하고 최초로 세계의 언론에 소개한 사람은 프랑스 콥트언어학자 장 도레스였다. 1948년 2월 23일 르몽드지는 "4세기 파피루스문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세계 인문학계에 소개되는 최초의 계기였다.

 

 

신화적 언어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언어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의미를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신화는 우리 삶에 품위와 의미와 목적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21세기 우리의 신화가 원시인의 신화보다 더 저열한 것일 수도 있다.

 

 

신앙이란 나의 상식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는 타자(the Other)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것의 제일의 조건은 타자 앞에 선 나라는 실존의 겸손이다. 모든 신앙은 존재의 겸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선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한 복음서의 원형이라고 하는 마가복음은 AD 70년경에 쓰여진 것이다. 예수는 흔히 AD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짐으로써 생애를 종료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 교계의 가장 큰 맹점은 교리적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 착각..

 

 

예수교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그리스도교)는 이미 역사적 예수와는 무관하게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상정되는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뭉쳐진 사도들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것이다.

 

 

부활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은 인과적 사실의 규명으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포(proclamation)나 설교의 양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포에 해당되는 희랍어로서 케리그마라고 부른다.

 

 

마태, 마가, 누가는 서로 관점이 공유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synoptic Gospels)라고 부른다. 즉 공관복음서라는 개념에는 요한복음이 들어가지 않는다. 공관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시대적으로 제일 앞선다는 이야기는 곧 나머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공통된 원초자료로 활용했다는 사실로부터 추정되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 자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또다시 공통된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는 것이다. 그 또 하나의 자료를 "자료"에 해당되는 독일어인 "크벨레"의 첫머리를 따서 보통 "Q자료"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 자료와 Q자료, 두 자료(TDH)를 보고 썼다는 것이다.

 

 

마가에 없고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Q자료를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 즉 Q자료는 어록(Record of Sayings)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도마복음서가 세상의 빛을 보기 이전에 Q자료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Q자료를 실체성을 확보한 Q복음서로 만들었다. 놀랍게도 Q복음서 속에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없는 것이다.

 

 

Q자료가 가설이 아닌 사실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사건이 바로 1945년 나그함마디지역에서 아부 알 마지드 라는 15세 소년이 사바크를 캐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도마복음서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도마복음서가 "예수 가라사대" 로만 이루어진 어록이라는 사실이 실체로서 눈앞에 드러났을 때 가장 경악한 것은 Q자료 신학자들이었다.

 

 

도마복음서는 114개의 가라사대 파편으로 구성, 도마복음서의 3분의 1이 정확하게 Q자료와 중복...

Q자료나 도마복음서의 원형은 이미 AD50년 전후에 성립했던 것이다.

 

 

복음(유앙겔리온)이란 예수의 세례와 전도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하나의 통일된 시퀀스를 지니는 드라마로서 엮어낸 이야기 양식인 것이다. 말씀집에는 드라마적 요소가 삽입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인간들과 일절 관련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뜻은 전혀 개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알지 못한다... 바울을 우리가 희랍적 사유에 깊게 젖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희랍인들에게는 뮈토스(신화)와 로고스(이성)가 구분 없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를 일관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바로 "무소유"다. 이 무소유의 사상이야말로 원시불교의 사상인 동시에 원시기독교의 핵심사상이었다. 무소유는 바로 현세적 가치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묵시담론은 후대 기독교공동체의 성격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묵시담론을 거부한 사상가였다. 재미있게도 도마복음서에는 묵시담론이 없다.

 

 

 

 

열 해를 갈고 나니

칼날은 푸르다마는

쓸 곳을 모르겠다

춥다 한들 봄추위니

그 추위가 며칠이랴

자지않고 생각하면

긴 밤만 더 기니라

푸른 날이 쓸 데 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시기 직전에 남긴 미완성 유고)

 

 

 

 

종교란?

"땅과 하늘의 갭을 메우려는노력이다. 그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홍구(鴻溝)가 있다. 그 도랑을 불교도들은 대각(大覺)을 통해, 유교도들은 인의(仁義)를 통해 넘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만을 통해 넘는다." (피터 플린트 교수)

 

 

야훼신앙의 창시자이며 유대민족 역사의 진정한 개조라 할 수 있는 모세도 이스라엘사람이기 전에 이집트인이었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규정짓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십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주류를 가장 적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완정한 도마복음 텍스트는 1945년 12월 나그함마디 엘 카스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콥트어로 쓰여진 것

 

 

 

 

 

☆ 도마복음이야기1

   -  김용옥 / 통나무 -

 

 

 

 

언젠가 TV나 인터넷에서 '도마복음'에 관한 대담 프로를 보고 호기심에 책을 구입했다.

세 권으로 그 첫번째 책을 정리-

어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기독교나 성경에 관한 편견을 씻게 해주는 '도마복음'이란, 마치 초기불교경전인 '숫타니파타'나 '논어' '도덕경'처럼 지혜로운 담론이라서 다가가기 쉽다.

예수나 싯달타처럼 성인의 사고체계란 비슷하고 읽기에 따라선 똑같기까지 하다!

 

어쩌면 인류탄생 이후 '사람의 길'이란 '변함없는 올곧은 한 줄기의 원리'만을 필요로 하는 지 모른다.

사람이 그러한 진리에 따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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