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발생 3주일이 지났으나 재난지에서 200㎞나 떨어진 도쿄에 사는 나도 무겁게 드리운 구름 같은 불안에 잠겨 있다.
가장 큰 불안은 원전 사고가 수습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미국, 프랑스, 중국, 한국 등에서도 높은 관심 속에 주시하고 있다. 미국은 기술과 인력을 대거 동원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대통령까지 일본에 날아왔다. 이것은 세계에 동심원처럼 번지는 동정과 지원이라는, 매스컴이 좋아할 미담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들 나라가 핵에너지와 핵무기에 깊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후쿠시마 원전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독일에서는 이미 지방선거에서 원전 반대파가 승리하고 메르켈 정권은 정책 전환에 내몰리고 있다.
지진 이후 ‘일본은 강한 나라’라고 외치는 걸 볼 때마다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국민적 단결을 위해 ‘국민의 적’이 필요해질 때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아직 긴장을 풀 상황은 아니다.
‘외국인 절도단이 재난지역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인터넷·휴대전화로 대량 유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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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에선 독일과 같은 움직임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재난 발생 직후부터 ‘일본인’들이 사회질서를 지키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고 있다는 국제적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형 위기를 당하고도 스스로의 생명과 생활을 지키려는 주장을 펼 수 없다면 그것은 국가와 기업만 좋아할 ‘미풍’이 아닐까.
내가 가르치던 학생 한 명이 3월 초에 서울로 유학을 갔다. 그 여학생은 원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북 간토(관동) 출신이다. 메일을 보냈더니 이런 답장이 왔다. “어제 전철역 편의점에서 과자를 샀습니다. 아주머니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일본이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울면서 어쨌든 가슴이 아프다, 이웃 나라인데 내 일처럼 편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엔 나를 껴안고 과자까지 주었습니다. 나는 어쩐지 복잡한 기분입니다. 한국에서 슬픔을 공유해주려는 건 정말 훌륭한 일이지만,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존재가 주변의 동정을 사게 되는 데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이 ‘위화감’에 대해 한번 더 자세히 써 보냈다. “실은 저는 지진을 물론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그 소식을 전하는 보도에 대해 몹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인은 훌륭한 국민성을 지녔다’는 보도가 많이 나왔는 데, 일본 미디어가 그런 보도를 역수입하는 데 혐오감을 느낍니다. 거기에 ‘일본인이어서 다행이다, 일본인은 훌륭하다’는 의사적(擬似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감동을 얘기하고 있고 그중에는 ‘이런 훌륭한 일본인인데, (전쟁 책임 등에 대해) 참회를 계속해온 건 재고해야 한다’는 불쾌한 발언까지 있었습니다.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소수자)에 대한 압박이 염려됩니다.”
지금까지 일본 일반인들이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고 질서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정말 기쁜 일이지만 이것을 다른 국민과 비교해서 ‘일본인’의 우수성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 곧 ‘국민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잘못이고 위험하다.
도쿄도의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이번 해일(쓰나미)은 “일본인의 욕심(我欲)”을 씻어내는 ‘하늘의 벌’(天罰)이라고 발언했다. 국가주의자인 그는 ‘일본인’이라고 묶어버리는 걸 좋아한다. 무서운 피해를 당해 고생하며 죽어가는 건 도호쿠 지방 사람들, 특히 고령자와 어린이들이며 ‘욕심’을 반성해야 할 권력자는 그 자신인데 ‘일본인’이라는 포괄로 그런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시하라 지사도 이재민도 모두 ‘일본인’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의 ‘미풍’(美風)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일본인의 미풍’이라는 언설의 이면에는 다른 국민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과 멸시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재난 유토피아>(레베카 솔니트)라는 책은 큰 재난을 당한 현장에서 약탈이나 치안 악화가 진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썼다. 거의 모든 재난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무수한 이타적인 행위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스스로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도 배려를 베푼다. 그런 상태를 무너뜨리는 건 “사람들은 야만이 될 것”이라 믿고 공황상태에 빠지는 엘리트층이다. 지은이는 그렇게 지적했다. ‘일본인의 미풍’이라는 언설은 이런 엘리트층의 패닉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지진 재난 이후 텔레비전에는 스포츠 선수와 록 가수들이 나와 ‘일본은 강한 나라다’ ‘힘내라, 일본’ 등을 외치고 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나는 몹시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런 포괄적 레토릭으로 국민적 단결을 고무하고 고난을 극복하려는 것이겠지만 그 단결을 위해서 ‘국민의 적’이 필요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곤경이 장기화하고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간다면 필시 ‘적’을 만들어내려 할 것이다. 거기에 반대하는 국민은 ‘비국민’이 된다. 그것이 예나 제나 권력의 상투수단이다. 그때 ‘적’이 돼버릴 가능성이 높은 존재가 ‘조선적’(‘북한’ 국적이 아니다)의 재일조선인이다. 그들에게는 도망갈 장소도 보호해줄 국가도 없다. 나는 이번에도 마이너리티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지 않을지 긴장했다. 아직 긴장을 풀 상황은 아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외국인 절도단이 재난지역에 들어갔다’는 등의 근거 없는 선동이 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대량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1923년 9월1일 간토 대지진 때 6000명 이상의 조선인, 200명 이상의 중국인, 무정부주의자 등 수십명의 일본인들이 학살당했다. 그 학살은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우물에 독을 풀어넣고 있다’는 유언비어로 시작됐고, 그것을 관헌이나 언론이 증폭시켜 일어났다. 이시하라 지사는 2000년 자위대원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오늘날 도쿄를 보면 불법입국한 많은 삼국인(三國人), 외국인이 아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재난이 일어날 경우 커다란 소요사태까지 벌어질 것으로 본다.” 인종간 민족간 적의를 선동하는 이런 발언을 지사라는 고위공직자가 내뱉는 것은 유엔 인종차별금지조약에 명백히 위배되지만 이시하라 지사는 높은 지지율로 재선됐다. 그런 곳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가 될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논설위원
20110409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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