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위너' 먹여 살리는 '루저'

by 오직~ 2009. 12. 5.

 

한승동의 동서횡단 /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지난달 29일 폐막한 제10회 도쿄 필멕스 영화제에서도 최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영화제를 공동주최한 아사히신문이 이 소식을 전하면서 <똥파리>를 이렇게 소개했다. “가정내 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불량청년과 여고생의 만남(소통)을 그린 작품.” 딱히 잘못된 소개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런 시각으로 <똥파리>를 제대로 읽어낼까.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와도 어쩌면 상관없이 마음대로 읽는다면, <똥파리>는 처참한 세계 모순구조를 상처입은 불량배의 절망적인 몸부림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한 알레고리(우의)다.

 

길가 전봇대나 육교 또는 뒷골목 어두운 담벼락에 ‘떼인 돈 책임지고 받아줌’류의 으스스한 선전문구를 붙인 조직의 말단 행동대장쯤 되는 그 불량청년. 관객들은 우선 ‘인간말종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그의 패륜행위에 충격먹고 치를 떤다. 과거 ‘뒷골목 영화’들이 그린 밑바닥의 비참을 우스개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악랄한’ 양익준의 극사실적 묘사. 그 구역질나는 욕지거리와 낭자한 폭력의 난무야말로 실은 <똥파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의 실상 그 자체가 아닐까.

 

엄마를 죽인 아버지의 폭행과 그 아버지를 발작적으로 두들겨패는 불량청년, 베트남전 참전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고 돌아버린 여고생 아버지의 집 나간 아내에 대한 끝없는 언어폭력, 폭력의 대물림을 상징하는 여고생의 불량 남동생. 이 땅의 비극적 역사를 아로새긴 전형들인 이들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맨 밑바닥 하류인생들. 요즘 말로 하면 ‘루저’ 중의 루저들이다. 하지만 피라미드 상부의 ‘위너’들은 바로 이들 루저의 악다구니와 폭력과 피와 눈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처참무비의 지옥도를 그리며 받아낸 떼인 돈들이 루저들 손을 단계적으로 거쳐 결국 흘러가는 곳은 상부의 위너들 주머니다. 거들먹거리며 ‘개폼잡는’ 가진 자들의 안락과 호사를 세상 사람들은 부러워하겠지만 그들의 위선이 발 딛고 있는 곳은 똥파리들 우글거리는 구더기통이다.

 

한반도는 그런 모순구조의 확대판일 수 있다. 주변 가해자들은 지금도 그 모순구조 위에 군림하면서 강자로 거들먹거리고 분단까지 당한 희생자들은 욕설과 폭력을 주고받으며 동족을 서로 갉아먹고 있다. 또 남북 각기 내부에 이런 모순구조의 닮은꼴을 확대생산하며 무자비한 먹이사슬을 완성했다. 죄를 지은 가해자들은 거들먹거리며 안락을 누리고 그 피해자인 밑바닥 인생들이 피튀기며 악다구니짓으로 연명하면서 가해자들을 먹여살리는 피라미드 구조. 그런 구조는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중남미로 확장되고,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어디에나 존재한다.

불량청년이 여고생과 아이 등을 매개로 그 모순구조를 체감하고 같은 밑바닥들 처지에 공감하면서 갈취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순간 그는 제거당한다.

 

사람 접근을 거부하는 기괴한 콘크리트 광장과 저금통 같은 동상이 버티고 있는 화려한 서울 광화문에서 <똥파리>를 생각했다. 외국관광객들이 필시 이 나라를 상시 계엄하의 ‘바나나 공화국’쯤으로 여기게 만들 즐비한 ‘닭장차’들 모습도 그런 모순구조를 가리려는 방패막이가 아닐까.

 

20091205한겨레 한승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