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

‘필요’만 허용되는 헐벗은 삶이여 / 박혜영

by 오직~ 2009. 4. 18.

최근 정부는 208명이던 국가인권위의 규모를 164명으로 대폭 축소시켰다. 인권위의 인원이 ‘불필요하게’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는 인권위가 처음 생겼던 2002년에 비해 인권 관련 민원이 10배 이상 증가했지만 정부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구조조정을 했다. 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부는 국립오페라 합창단도 해단시켰다. 42명의 단원들이 그동안 4대 보험도 안 되는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알고 보니 규정에 없는 임의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인권위와 마찬가지로 2002년 처음 창단된 이래 오페라합창단의 공연 횟수는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정부는 ‘필요없다’며 전원을 해고시켰다. 사람을 필요한 사람과 불필요한 사람으로 가르는 것은 비단 정부만 하는 짓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효율성이나 필요성이란 말은 정부, 기업, 학교, 병원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람을 털어낼 때 사용하는 구조조정용 잣대가 되었다. 아마도 ‘자른다’는 말을 사람에게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우리 시대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며, 사람이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할 때 우리 삶이 어떤 비극으로 떨어질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필요성의 논리가 횡행하는 사회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더 많은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게 되고, 일평생 이런 악다구니에 시달리다 보면 인간의 존엄성도, 아름다운 예술도 마침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한때 왕이었던 리어의 처참한 몰락을 통해 사람살이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희곡이다. 흔히 리어는 욕심 사나운 두 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욕과 분노를 겪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람다운 삶을 오직 ‘필요성’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그런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묻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늙은 리어는 세 딸 가운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허풍을 떤 두 딸에게만 영토를 물려준 뒤 자신은 1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두 딸의 왕국을 오가며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어의 낭만적인 생각은 이내 본색을 드러낸 두 딸들의 현실논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먼저 불필요한 수행원 수를 줄이지 않으면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 큰딸은 100명은 많으니 50명으로 줄이라고 하고, 둘째딸은 50명도 많다며 25명으로 줄이라고 한다. 그러자 다시 큰딸은 우리가 돌봐드리니 실은 한 명도 필요 없다고 되받아친다. 두 딸의 배은망덕에 격분한 리어는 사람의 삶을 필요성으로 논하지 말라며 이렇게 고함친다. “오, 필요를 논하지 말라! 가장 미천한 거지도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나마 여분을 갖는다. 자연이 인간본성에 필요한 것 이상을 허락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만큼 비천할 것이다.” 늙 은 왕은 마침내 사랑하던 막내딸도, 드넓은 영토도, 왕의 지위도 모두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아 거지와 광대와 광인들과 함께 황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끝끝내 리어는 두 딸들이 말한 필요성의 현실논리에 순응하지 않는다. “싫다! 늑대나 올빼미와 한 무리가 되어 필요성의 날카로움에 쥐어뜯기느니 맹세코 모든 거처를 버리고, 모든 증오에 맞서 싸우는 편을 택하겠다.”

 

리어의 말대로 사람이 단지 생을 연명하기 위한 것, 그 이상을 삶에서 누릴 수 없다면 우리는 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딸들에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빼앗기고 광야를 헤맸던 미친 리어처럼 그런 삶에서는 인간 정신이 깊이 병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위 불필요한 것은 모두 빼앗기고, 오직 필요한 것만 허용되는 삶이란 짐승처럼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사는 삶이며, 이런 ‘헐벗은 삶’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하지만 예술이나 인권은 결코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필요성의 논리로 보면 마치 물이 빠진 갯벌이나 물이 고인 늪지가 모두 불필요하게 보이듯이 예술이나 인권도 불필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찍이 리어가 두 딸에게 절규했듯이 만물은 눈에 보이는 ‘필요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봄날 새싹도 보이지 않는 땅의 힘으로 움터 나오는 것이며, 가을날 알곡도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으로 익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제대로 여물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치 나무에게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새에게 먹이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만약 가끔 잎사귀를 흔들어주는 바람이 없다면, 그리고 마음껏 날갯짓할 텅 빈 하늘이 없다면 나무도 새도 모두 살지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오직 경제논리로만 삶을 저울질하게 되면 그동안 필요성의 영역 밖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점차 필요성의 영역 안으로 넘어오게 된다. 곧 나무는 목재가 되고, 강은 운하가 되며, 갯벌은 용지가 된다. 이렇게 자연이 그저 쓰고 버리는 자원이 되면 다음엔 사람도 그저 쓰고 버리는 인력이 된다. 그래서 필요성의 논리가 횡행하는 사회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필요할 때는 희소하지 않던 것들이 일단 필요성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희소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물은 희소하지 않지만 수자원으로 바뀌면 늘 부족하게 되고, 땅은 희소하지 않지만 택지로 바뀌면 늘 부족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부족하지 않지만 인력으로 바뀌면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을 늘 부족하게 된다. 이런 사회는 오직 경쟁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사람들은 더 많은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게 되고, 일평생 이런 악다구니에 시달리다보면 인간의 존엄성도, 아름다운 예술도 마침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짐승처럼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극작가 이오네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쓸모없는 것의 유용성과 쓸모 있는 것의 무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는 바로 노예와 로봇의 나라가 될 것이다.” 예술이나 인권은 노예나 로봇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요성’이나 ‘효율성’의 논리에 갇혀 있는 한, 우리가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도 닫히게 될 수밖에 없다.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20090418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