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도덕적 부패·제3세계는 편협한 도덕…
조승희의 과대망상은 선-후진국 갈등과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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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관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망상의 한 뿌리가 분명 경직된 도덕주의에 있다는 사실이다. 버지니아 공대생이나 미국을 도덕적 타락이라는 눈으로 보게 하는 관점은 이미 그의 가정적 배경에 들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가난을 탈출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세탁소를 경영하여 생활의 기반을 잡고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데 성공한 건실한 생활인이다. 그것은 희생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조군은 이러한 집안에서 이미 엄숙한 인생철학을 습득하였을 것이다. 기숙사 동료들의 말로, 그는 으레 밤 9시에 자리에 들고 새벽 5시면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한다. 그에게 다른 학생들의 생활은 돈과 퇴폐와 거짓의 생활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살해를 내용으로 한 그의 연극은 아버지의 권위를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민자는 청교도 후계자”
실용적 도덕주의는 한국 이민의 태도 일반에서 발견된다. 영국에서 이민하여 미국에 정착한 작가 조나단 레이반의 책에 〈가슴 아픈 씨(氏)를 찾아서〉라는 미국 견문기가 있다. 거기에는 이민해온 한국인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
그가 만난 한국인은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일하고 돈을 버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민자들 가운데 한국인이야말로 기독교의 노동윤리와 17세기 영국 이민의 청교도주의의 후계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한국인 목사는 미국을 쾌락과 오락과 유혹의 나라라고 규탄하고 그의 사명은 한국 이민들이 이러한 미국의 부패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는 자기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게 되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그런 경우 딸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다. 레이반은 미국 사회를 별로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책 제목의 ‘가슴 아픈 씨’(Mr. Heartbreak)는 미국을 근면하고 성실한 자작농의 낙원으로 그린 18세기의 프랑스인 여행자 크레브쾌르의 이름의 뜻을 풀어 놓은 것이다.
오늘의 미국에는 크레브쾌르가 그린 농부보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레이반이 일과 돈과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한국 사람들을 곱게 보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조금 넓혀 볼 때, 미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봄으로써 자기를 정당화하고 방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만이 아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현대적인 시조로 간주되는 사이드 쿠트브의 정신적 각성은 그의 미국 견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미국에 유학하고, 미국이 여러 가지로 부패한 나라라는 판단을 내린다. 세속적인 광고 전략을 사용하는 데 서슴이 없는 미국의 기독교 교회와 젊은이들의 문란한 성윤리는 그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본국 이집트로 돌아간 다음 그는 이슬람형제동맹을 창설하여,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 그리고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테러리즘의 정신적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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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후진국의 사람들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도덕적으로 부패한 나라라고 보고, 선진국 사람들이 후진국의 사람들을 편협한 도덕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기방어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시각이 많은 단순화와 모순을 포함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도덕적 부패나 편협한 도덕주의가 어느 쪽에 더 많은지, 그리고 제국주의의 오만과 그 피해자의 왜곡된 심리, 어느 쪽이 더 사태를 보는 눈을 뒤틀리게 하는지 이것들을 정확히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는 하나 사실과 심리의 왜곡이라는 문제를 떠나, 개인이나 국가가 일정한 정신적 기율이 없이 오래 살아남을 수 없고, 편협한 도덕주의가 사람의 삶에서 관용과 평화를 빼앗아가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한국인은 지금의 시점에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 모순 속에서 심리적 사회적 갈등을 가장 강하게 겪고 있는 국민인 듯하다. 조승희 군의 정신착란 또는 망상은 이러한 갈등에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현실적 모순과는 별도로, 이러한 부질없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국인이 당면한 시급한 과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세계의 모든 사람 앞에 놓인 세기의 과제이기도 하다.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20070421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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