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격류였다
새해란 앞으로 가는 시간이지만 그 앞은 뒤의 시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구러 시간은 또 흘러가는 것만이 아니라 흘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왜 있지 않은가, 과거는 내일의 기억이라는 말.
백한 살에도 여행 준비를 서두르다가 생애를 끝마친 사람이 있다. 알렉산드라 다비드넬.
인간이 자신의 희로애락을 통해서 쌓아온 삶이 신성성이 자주 모독당하는 것이 낯익은 일상이 되었다.
타심통他心通! 혈연적인 해석으로 보자면 자아가 또 하나의 자아인 타자가 될 때, 거기에서 타자로서의 새로운 자아가 태어나게 될 때 시 속의 화자는 자아의 궁극인 무아에 돌아갈 것이다.
나는 너 없이는, 너에 대한 헌신적인 귀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끝내 나는 너뿐 아니라 나라는 것과 너라는 것의 무한한 복수인 제3인칭의 인드라망을 이루어 사私가 아닌, 공空에이르게 된다. 그 공空이야말로 묘유妙有일 것이다.
요컨대 화자의 '나'는 '다른 나'의 세계이다.
아직 멀다. 나는 간다.
시의 은유는 자아의 타자화이고, 타자의 자아화이지요.
그 울음, 응애응애 하는 그 울음은 삶의 시작을 뜻하는 인류의 오랜 불안의 축복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불러온 우주의 울음이 바로 시의 처음일 것입니다. 시에는 그러므로 언제나 처음과 끝이 들어 있습니다.
시는 아마도 어둠 속에서 존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는 행위일지 모릅니다.
근대 이래 추구해온 인간학이라는 인문정신이나 저 르네상스로 싹튼 휴머니즘의 사상 따위에 어떤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의 존엄성을 타자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자연은 모든 오염과 모독을 치유하는 정화의 원리로 이어지는 생명의 본체입니다.
살아지는 것을 박차고 살아나가는 나의 삶 말입니다.
자치야말로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이상의 방식이다.
생명은 언제나 현재의 자기로부터 떠나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나는 불가불 누구와 대면하고 있다. 그 누구야말로 또 하나의 내가 아닌가.
이 세상의 모든 장소는 방금 시가 떠난 장소이다. 또한 다른 장소에서 온 시가 낯선 설렘으로 이제 막 발 디디는 장소가 곧 세상이다.
(시는 나그네이다)
통일이란 무한 프로젝트입니다. 마치 온전한 세계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 영원한 미완인 것처럼, 통일 역시 레닌 식으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거듭하면서 변증법적이기보다 시행착오의 숱한 경험들을 통한 지혜의 실천을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지혜란 태초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오랜 우매와 후회의 열매입니다.
☆ 나는 격류였다 (2010/11)
- 고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은유의 천재다. 고은 시인!